[하이큐/츠키야마] 나와 같아. 下

연성질/안녕큐 2016. 2. 7. 16:24
 늘상 곁을 지켜주는 녀석이 있다. 첫 만남은 꽤나 오래 전, 뭐, 옛날 이야기는 취미가 아니니 그 정도로만 해두고 덧붙이자면 여전히 이런 사이이다. 언제나 내 옆에 붙어서 나의 기분을 알아주고 이것저것 이야기 해주고, 가끔은 귀찮게 굴지만 최근에는 그런 모습도 봐줄만 한 것 같다. 나랑은 정반대의 느낌. 늘상 생글거리고 열심이다. 바보 콤비 앞을 제외하면 항상 친절하고 상냥한 편이다. 지나가다 붙들려 나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어 귀찮을텐데도, 내가 시끄럽다고 핀잔을 주어도 웃는 얼굴이다. 그 웃는 얼굴이 보기 좋다.

 “안경군은 항상 함께 다니는 딸기군을 좋아하지?”

“하아? 딸기군은 또 뭡니까. 그보다 그 안경군이라고 부르는 것 좀 그만두시죠.”

“그렇담, 츳-키?”

“카라스노의 1학년 그만 괴롭히고 이리로 와, 쿠로.”

“아, 알겠어, 켄마. 혹시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연락하라고. 츠읏-키.”

 너만이 부르던 그 이름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자니 이상해. 차라리 안경군이라던가, 호타루라던가 하는 호칭이 나을지도. 끔찍하게 싫던 별칭이 더 낫다니. 그렇지만 야마구치가 나를 부르는 ‘애칭’같은 것이 다른 사람과 공유된다면 그거대로 마음에 들지 않아. 그의 마지막 말이 무슨 의미일까 생각해보았는데, 어째서인지 휴대폰에 번호가 저장되어 있더라. 그러고보니 그가 늘 붙어다니는 작은 세터와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고.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아니, 역시 그건 좀 별로일지도.

 쿠로오상을 만났어. 도움이랄까, 이 사람은 그냥 날 놀리는 일이 즐거운 것 같지만 이걸로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이건 친구에게 갖는 감정이 아니야. 근데, 난 있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두려워. 이런 점은 형과 조금도 다르지 않네. 어쩔 수 없잖아? 같은 츠키시마인 걸. 모른 척 할 거야. 전부터 날 향한 네 눈빛은 항상 동경. 네게 난 그저 그런 존재였지. 난 다가가는 법을 모르는데 넌 나를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해. 애당초에 내가 다가가려 해도 네가 도망가 버릴지도 모르는 노릇이잖아. 스스로 괴로운 일은 만들지 않을 거야. 형처럼 되지 않을 거라고.

“저, 츳키-”

“약속이 있어. 먼저 갈게.”

“으응, 알겠어..”

 그 이후로도 몇번이고 쿠로오상을 만나 조언을 구했다. 그는 곧잘 나를 아이취급하며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그럴때마다 그의 입에서 언급되는 야마구치의 이름에 별다른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부끄러움. 낯선 감정이었다. 빨리 달린 것도,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아닌데 심장 박동수가 높아졌다. 그 이상한 감정이 어색하였다. 그리고는 다음 날, 야마구치, 너를 봤을 때 처음으로 감정에 이성이 잠식당함을 느꼈다. 본능이 소리쳤다. 들켜서는 안돼, 절대로.

“츠키시마, 집 가자!”

“아, 오늘은 안돼.”

 1초만 더 머물렀다면 위험했을 거야. 당장에 떠오른 느낌에 휘둘려 내 멋대로 행동했을 거야. 이런 거 있어서는 안되는 거잖아. 넌 항상 노력하는데, 난 전혀 그렇지 않아. 네 충고를 듣고도 전혀 변하지 않았어. 멋있는 건 이쪽이 아닌 네 쪽. 도망치고있는 건 항상 나였어. 그렇다고, 이걸 알아버렸다고 해서, 뭔가 해결되는 건 아니거든. 난 항상 이럴 거야. 평생 변하지 않겠지. 언젠가 너도 이런 날 알겠지. 그렇다면 나를 떠날 거야? 그렇게 된다 해도 나는 잡지 못할, 않을 거야.

 “근데, 케이(츠키시마의 고집으로 바뀐 호칭), 진심으로 거절인 거냐? 딸기군이 널 좋아하더라도?”

 “그런 터무니 없는 가정은 관두죠. 그리고 야마구치를 그런식으로...”

 야마구치가 날 좋아한다면? ‘츳키-’하는 음성이 떠올랐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주근깨 투성이의 귀엽지 않은 얼굴로 웃음짓는 모습이 머릿 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쿠로오상의 손이 머리 위로 올려졌다만 지금은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뭐라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이 자꾸만 드러나 혼란스러워지면 자꾸만 감정에 지배되었다. 지금처럼 눈 앞의 야마구치 두고도 반갑지 않은 척 거리를 좁힌다거나 하는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아, 잠시만.

“야마구치...?”

 야마구치의 표정이, 뒷모습이 이상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빠르게 눈 앞에서 사라졌다. 공간이 닫혔다. 모두가 잠잠해졌고, 야마구치가 서 있던 곳, 달려나간 곳에 차례로 그의 모습이 형상화 되었다. 느릿하게 눈이 마주치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것봐라, 주전 선수 명단에 츠키시마라는 이름은 없지 않으냐. 오래 전의 기억에 야마구치가 끼어들었다. 소꿉친구를 연애대상으로 느낄리 없지 않으냐.

“츠, 케이. 이대로 놓지면 영영 잡지 못한다고?”

“괜찮아요. 어차피, 언젠가 겪을 결말이었고, ...”

 괜찮지 않아. 마지막 그 얼굴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아서 너무 걱정 돼. 이대로 널 영영 잃을까봐 두려워. 내가 지금 뭘 해야해? 너무 늦어버린게 분명한데. 이제와서 나는 사실 너를 좋아했으니까 우리 친구는 그만두자고 이야기 해야 하는 거야? 그런 거 말도 안 되잖아. 바보같아. 전처럼 다가와서 물어 주었으면, 마법처럼 모두 이야기 해버렸을지도 모르는데. 네가 너무 다른 사람인 것 같아서, 내가 알던 야마구치가 아닌 것 같아서 도망쳤어. 네가 없는 곳으로, 너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한심하네.”

 쿠로오상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 그의 판단이 정확했다. 수 없이 많은 기회를 걷어차, 이 자리까지 나를 밀어낸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한심한 놈. 그 말이야말로 지금의 내게 가장 어울렸다. 숨기기에 급했고, 지켜낼 의지가 없었다. 봐줄만 한 적당선만 넘기면 그거대로 오케이였다. 간혹 성에 차지 않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한심한 녀석이 맞다. 그러나 역시 남에게 들으면 열받네.

간신히 마음을 먹었는데 넌 학교에 왜 안 나왔을까.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전화할 용기가 났는데 기나긴 신호 연결음을 끝으로 넌 끝끝내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잖아. 정말 많이 아픈 걸까, 그게 아니라면 단지 내가 보기 싫어진 걸까. 어느 쪽이든 싫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잠 들어서 받질 못했어, 미안해 츳키]_야마구치

 [할 얘기 있는데 너희 집으로 가도 돼?]_야마구치

 연락이 온 것은 저녁이 되어서였다. 두 번째가 아니라 다행이야. 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이른 감이 있었지만, 야마구치의 문자 두 줄이 충분히 안도감을 주었다. 신이 이토록 한심한 나를 가엾게 여겨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일까. 도저히 그 이상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다. 뭐라도 해 보는 편이 낫잖아. 그걸 위해 그동안 쿠로오상을 만났던 것이고, 결국 결정을 내리는 것은 나야.

 ‘켄마는 내가 배구를 하는 이유야. 네게도 그런 거잖아, 딸기군이.’

 ‘그래.’ 짧은 답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어. 괜히 늘 집에서 입던 면티를 새것으로 갈아입고 혹시라도 네가 들어올까 방 청소도 다시 했어. 형 도움으로 감기에 좋다는 유자차도 끓여놨어. 너만 오면 돼. 이런 거 전혀 나답지 않은데, 사람이란게 강한 동기가 있으면 변하기도 한다잖아. 떨리고 긴장이 되는데, 네가 기다려지는데, 무서워. 무섭다. 모두 알아버린 네 반응이 어떨까 두려워. 널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봐.

 초인종이 울렸다. 급하게 문을 열었다. 추워서인지, 감기탓인지 붉은 얼굴 탓에 ‘딸기군’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목 뒤가 화끈거렸다. 심장이 펌프질을 시작했고, 그에 맞춰 호흡이 빨라졌다. 더 있으면 귀라던가, 얼굴이라던가 야마구치처럼 빨갛게 변할 것 같았다. 음이 엇나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말을 뱉었다.

 “빨리 안 들어오고 뭐해?

 “저, 츳키-”

 “감기잖아, 볼이 빨개.”

 얼굴이 일그러져서, 그 날 같은 표정을 지어보여서 가슴이 철렁했어. 정말 이대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네가 울먹여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듯 위태로운 모습으로 서서 무언가를 간신히 참아대며 입을 열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물어도 돼? 그 눈물의 의미가 뭐야. 너는 뭐가 그렇게 무섭고 두려운 거야.

“좋은 사람 만나서 다행이다. ”

 ‘딸기군이 너를 좋아하더라도?’ 그 말이 왜 이 타이밍에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그저 그 한마디가 몇번이고 귓가에 맴돌았다. 야마구치의 눈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야마구치가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들썩이는 어깨를 보면서 무슨 행동을 해야할지 몰랐다. 예상이라던가, 상상과 전혀 다른 전개에 벙쪄있었다.

“네코마의 주장이라면, 정말 멋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 쯤 되어야 츳키랑 어울리니까.
난 정말로 잘 됐다고 생각해. 축하해 츳키―”

“야마구치.”

 나의 부름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억세게 깨문 입술에 상처가 생길 것 같았다. 이런 것은 정말 이상하다. 사고회로가 정지하고 내가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르는 상태. 한참을 몸을 움직여 그에게 다가가서야, 우리가 너무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무슨 생각으로 네게 입을 맞춘 건지는 모르겠어. 놀란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멈춰진 네 모습이 조금은 우스웠어.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알 수 있어. 이 두근거림은 나만의 것이 아니야. 잡아도 될까. 네 손을 잡아도 괜찮을까.

 “츠,츠츠츳키― 저기, 이건…!”

 “시끄러워, 야마구치. 들어왔다가 가.”

 야마구치의 손목을 잡았다. 귓바퀴가, 온 몸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건 아닐까 불규칙한 호흡에 걷는 것도 힘들었다. 손목 너머로 느껴지는 야마구치의 나만큼이나 불규칙하고 가쁜 것 같았다. 늘상 함께있었는데 처음 만났던 날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두근거렸다.

 “나 아픈 거 같아, 츳키!”

 “감기면서 밤중에 돌아다니고 그러는데 안 아픈 쪽이 이상한 거지.”

 나는 이런데, 이런 상황에서 하는 말이 ‘나 아픈 거 같아, 츳키’? 나, 참 그러니까 아프면 집에서 쉴 것이지 귀찮게. 알맞게 식은 차를 컵에 담아서 건넸다. 받아든 표정이 잔뜩 들떠, 나까지 붕 뜨는 거 같았다. 이런 거 정말 귀찮고 짜증나는데, 너라면 나쁘지 않아. 나도 너와 같아, 야마구치.

 

+)

 야마구치 타다시. 작은 체격에 주근깨 투성이, 전혀 귀엽지 않은 얼굴. 나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뭐, 다른 사람이라고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굳이 꼬집어 말해 첫 눈에 반한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그 쪽이 이상하지 않을까. 고작 초등학생이 누군가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지다니, 그것도 동급생의 남자아이를. 어쩌면 나는 애초부터 이상한 놈이었을지도.

 야마구치, 네 기억 속 그 날은 내가 노리고는 들어간 거라고. 너에게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 그냥 한 번쯤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보고 싶어서 대충 아무 말이나 내뱉은 거라고. 절대 멋있지 않았어, 너의 영웅도 아니야. 그래도 그 날, 망설이지 않고 너를 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야마구치.˝

˝응, 츳키―!˝

 아마 너보다 내 쪽이 훨씬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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