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쿠로켄] 빈자리

연성질/안녕큐 2016. 2. 26. 00:39

*캐붕과 저퀄주의.

*3학년이 졸업한 이후의 이야기 입니다.

 

‘켄마 빨리 일어나 연습 가야지.’

 

‘5분만..’

 

‘분명 야쿠에게 엄청나게 잔소리 들을 거라고!’

 

 몸에 익은 익숙한 상황이 재생되었다. 80%이상의 확률로,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잔소리는 지금 네가 하고 있어, 쿠로. 베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어딘가 이상한 소음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쿠로의 목소리도 아니고, 나의 목소리도 아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곁에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사람의 소리라고 하기 어려운 소리, 알람음 정도였을까. 눈앞의 그가 어딘가에 빨려 들어가 듯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컴컴한 세계에서 눈을 뜨자, 지나치게 높은 명도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늦겠네, 화내겠다.

 

…도대체 누가.

 

[켄마, 이번 합숙 때 볼 수 있는 거지? 그치?]_쇼요.

 

그동안 얼마나 지났더라. 인터하이를 위한 합숙 이야기가 오가는 걸 보니, 쿠로들이 졸업한지도 두 달하고 몇 주는 더 지났나 보네. 명확한 날짜 개념이 사라졌다.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날들이기도 했다. 배구를 하자고 내게 끈질기게 달라붙던 사람이 성인이 되어버렸다. 그는, 어쩐지 성숙하면서도 아이 같아서, 피터팬이 되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배신이랄까 조금은 허전하고 서운한 기분이다. 멍청한 생각이다. 한심한 감정낭비. 내가 이런 느낌을 받는다고 그가 다시 고등학교에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까.

 

“켄마! 늦다고! 벌써 연습 시작했어!”

 

“어어, 미안.”

 

“쿠로오씨가 없으니까 켄마씨는 매일 지각이네여. 어쩌면 둘은 최강 궁합 파트너였을지도 몰라여!”

 

‘당연한 거 아니야? 우리만큼 잘 어울리는 콤비가 어딨다고! 어떠냐, 부럽지 리에프!’

 

“그런 멍청한 소리 할 시간 있다면 리시브 연습이나 해둬.”

 

 바보 같은 것을 떠올려 버렸다. 어쩐지 귓가에 웅웅거리듯 울리는 소리가 없으니 어색한 것도 같고. 늘 내버려두길 바랐는데, 막상 이렇게 남겨지니 그의 빈자리가 크게만 느껴진다. 중학교 때에는 도대체 어떻게 버텼더라. 그 때는 시끄러운 사람이 졸업했다고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은데.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몸 이곳저곳을 훑었다. 불쾌하게 오싹한 기분이 싫어 팔을 비볐다. 쿠로가 있었다면 분명 감기냐고 엄청나게 귀찮게 굴었을 거야. 슬핏 웃음이 흘러나왔다. 호들갑 떨면서 뇌라던가, 척추라던가 하는 오글거리는 말을 내뱉고 병들어선 안 된다고 말했겠지. 야마모토의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지금, 이 현실 속 내 옆에는 쿠로오가 없다.

 

 벌써 골든위크 합숙. 그가 없는 시간은 빠르게도 지나간다. 무료하고 지루한 시간은 더디다고 들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게임을 하는 것도 지겹다. 쿠로가 없는 배구는, 다른 것들에 비해서는 양호한 편이지만, 이전보다 훨씬 귀찮고 성가시다. 그래도 오늘은 쇼요를 만나니까 조금은 기분 좋아질지도.

 

“켄마!”

 

“어어, 쇼요.”

 

‘넌 그 카라스노의 작은 녀석만 유난히 좋아한다고.’

 

 그야 재밌으니까. 쿠로만큼이나 재밌는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이 신기하니까. 그러나 뭔가 잃은 것 같은 빈자리는 여전했다. 쇼요의 긍정에너지도 어쩔 수 없는 게 있구나. 그런 게 쿠로와 관련된 일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이렇게 기분이 우울할 때면 귀신같이 알아서 애플파이 먹으러 가자고 해줬는데, 지금은 내게 그런 말을 해 줄 사람이 없어. 멋대로 결정내린 것은 이렇다. 적어도 1년 동안은 일일이 말해주어야만 다른 사람들이 나의 상태라던가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 테니까 그 일이 귀찮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쿠로가 졸업한 이후, 그동안 내가 느낀 불편한 감정은 그 때문이다. 내 판단은 거의 정확한 편이라고 했으니까, 이번에도 분명히 맞을 거야. 분명히―,

 

“늦었잖아, 켄마. 쿠로오씨가 기다리다가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고.”

 

어라―?

 

“잠 못 잤어? 내가 밤에는 게임 하지 말라고 분명히 얘기했잖아.”

 

…쿠로?

 

“근데, 무슨 생각해, 켄마?”

 

“…조금 더 늦어서 쿠로의 목이 빠졌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

 

“너무하잖아, 오랜만에 만나서!”

 

 응어리진 것이 녹아 사라졌다. 어떤 것으로도 메울 수 없던 깊은 골 사이로 무언가 꽉 들어찼다. 새로운 게임을 산 것도, 쇼요와의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닌데 조금은 두근거리고 찡한 기분이다.

 

“몸 풀게 토스 올려줘! 너무 오랜만이라 나랑 하던 감을 모두 잊은 건 아니지, 켄마?”

 

 손을 떠난 공이 느릿하게 날아갔다. 쿠로가 큰 키로 점프하여 공을 노리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공이 바닥을 강타하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아주 잠시 뛰었는데 숨이 가쁘다. 최근 너무 운동에 소홀히 해서 지친 걸까. 아아, 조금 다르다. 이렇게 주변이 일렁인 적은 없었다. 체력이 다했다고 마치 세상에 혼자 남은 듯 느껴지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그 울렁거림은 한 곳에서 파생되었다. 쿠로를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걸어왔다.

 

“나 내년에 꼭 쿠로가 있는 학교에 갈 거야. 그곳에서 함께 배구하고 싶어.”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그는 이내 웃어보였다. 우리가 함께 지내던 시간동안 보았던 것 중에 가장 멋있는 모습으로.

 

“그거 끝내주네!”

 

+)

 

“켄마, 작년 골든위크 합숙 기억나?”

 

“쿠로가 팀 과제하는 거 잊고 미야기현에 놀러왔다가 다음 날 잡혀갔던 거?”

 

“…그런 것만 기억하지 말고. 우리 학교에 오겠다고 그 날 말했었잖아, 실제로도 와버렸고.”

 

“응.”

 

“갑자기 왜 이야기했던 거야, 그거?”

 

“오래간만에 쿠로랑 배구하는 게 너무 즐거워서, 계속 함께 배구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쿠로는 의외로 자기 일에 둔하니까 말하지 않으면 모를 테고.”

 

―그리고 항상 함께이고 싶어서.

 

“쿠, 쿠로?”

 

“크흡…. 감동이잖아.”

 

바보같아.


 그치만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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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큐/쿠로츠키] 그 남자의 사정

연성질/안녕큐 2016. 2. 14. 03:30
*폰작업 저퀄, 캐붕 주의. 쿠로오 자존감 낮음 주의.
*쿠로오와 츠키시마는 여름합숙 때부터 사귀었다는 전재입니다.

 안경 쓴 까칠한 녀석이었다. 자존심이 강해 조금만 건드려도 자극할 수 있는 쉬운 타입이면서도, 어딘가 단단히 어긋나 금세 손을 놓아버렸다. 그 알 수 없는 건조함에 관심이 생겼다. 여름 합숙의 짧은 기간에 관심은 더욱 깊은 감정으로 변하였고, 내가 내민 손을 그는 조금 망설이더니 기꺼이 잡아주었다. 손에 가득 채워지는 그의 온기가 따뜻했다.

 처음에는, 맞잡은 나의 손마저 놓아버릴까봐 걱정했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그의 손을 붙잡은채 매달려야할지, 아프지 않게 보내주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정말 쓸데 없는 걱정임을 알았다. 더욱 견고하게 조여오는 손가락 사이의 압박감이 적어도 나의 고백을 거절하지 못하여 사귀는 것은 아니라고 안심시켜주었다. 어른인척 구는 그가 이따금씩 내게 기대어 온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 그는, 항상 감추려하지만, 감정을 쉽게 들키는 타입이었다. 싸움도 없이, 단란한 연애였다. 츳키와의 연애는 매일이 행복했다. 나는 그 행복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츳키는 고등학생, 나는 성인이다. 공부에 치이는 그와 돈에, 학점에 허덕이는 나는 서로에게 소홀해질지도 모른다. 나는 지레 겁을 먹었다. 어느 순간 그가 도쿄에 오는 것을 껄끄러워하면 어쩌지. 나와 만날 시간이 사라지면 어쩌지. 과제에, 알바에 밀려 더 이상 츳키와 시간을 맞출 수 없으면 어떡하지. 그저 나의 노파심이었다. 우리는 문제 없이 앞을 향했다. 다만, 그는 고집이 강했고, 나는 그런 그에 대한 걱정을 잊으려 저런 의미없는 생각을 되뇌었을 뿐이다. 나로인해 츠키시마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포기해버릴 까봐. 그렇게 된다면 내 쪽에서 그를 놓아줘야할테니까.

 츳키가 고3이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사귀는 중이다. 그는 공부할 시간을 버리며 나를 찾았고, 나는 이기적이게도 그런 그를 거절하지 못했다. 가끔은 밤을 새워 피곤한 눈을 하기도 했는데, 오늘치 일을 몰아서 끝내느라 그랬다고 대답했다. 사랑의 시작은 어슬프기에 위험하다. 그는 온전치 못한 마음을 내게 주려다 조금씩 망가지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결심했던 말들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던 거짓을 내뱉었다. 그 여름날, 얼음이 녹아도 짙어, 씁쓸하던 커피 앞에서.

 “벌써 2년째네, 우리 만난 거.”

 “그렇네요. 쿠로오씨랑 2년이나 만나게 될 줄이야.”

 “2년이나 됐으니까 이제 그만둬도 괜찮잖아? 오래 만났으니까.”

 2년이나 만났으니 헤어져도 좋다니. 우습지도 않은 말을 내뱉고는 일어섰다. 넘쳐 흐르던 감정은 그 작은 커피잔에 몰아넣고 모두 녹여냈으니 더는 신경쓸 것도 없다. 츳키는 뭐든 철저하니까 내가 없다면 더는 망가지는 일도 없을 것이고, 분명 금세 좋은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은 성숙해진 것으로 진짜 사랑을 이룰 것이다. 나와의 연애는 그저 성장을 위한 연습 경기였으니까. 배구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다음이 없다는 것, 정도일까.

 츳키가 보고 싶어지면, 욕심 내지 않은 자신을 탓했다. 가끔씩, 술에 취할 때 라던가, 모른 척 그에게 전화를 걸면 항상 꺼져있는 츳키의 핸드폰이 그를 대변해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너무 힘들어서, 나와의 이별이 못견디게 괴로워서 아프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식 속 그는 여전했다. 다행이야. 분명 그게 맞는데, 어쩐지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서운하긴 하네.

 오늘은 억지로 이끌려 나갔던 소개팅에서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누군가를 소개 받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고는 멋있게 도망쳤다. 츳키와 헤어진 계절은 여름이었는데, 어느새 바닥에는 낙엽이 잔뜩 깔려있다. 그 날 이후로 그 카페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커피에는 입도 댈 수 없었다. 그를 잊기위해 모든 추억을 돌고 돌아 피했다만, 언제나 가장 최악의 순간에 마주쳐 나를 주저앉게 만들었다. 오늘, 바로 지금처럼.

 “쿠로오씨.”

 머리가 멈추어 버렸다. 가끔 시험지를 보고서 이랬던 경험이 몇 번 있지만, 오늘은 유난히 당황스러웠다. 심장 소리에 묻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조금 마른, 그렇지만 여전히 심술궂은 그 얼굴이 반가워 울음이 터져나올 뻔 했다. 아, 츠키시마. 바보 같은 호명이 내 최선의 대답이었다. 성대가 제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을 간신히 꺼내어 내뱉은 말이니까.

 “잘 지내시는 것 같네요. 그럼 가볼게요.”

 츳키가 너무나도 의연해서, 당황해서 머리까지 멈추었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눈 밑이 따끔거리고, 목구멍이 꽉 막혀 아팠다. 그가 걸어온 길을 따라 반대편으로 멀어졌다. 돌아보지 않는다. 미련 갖지 않는다. 이 끔찍한 카페 앞을 지나치며 나는 절대 울지 않는다.

 아마 내가 겪어본 상황들의 안에서, 후회하지 않는 선택은 없다. 어떤 것이든 반드시 끝에 다다르면 가슴을 치고 원망할 것이다. 그러나 그 옛날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이 선택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다른 어떤 선택들 보다 이것이 베스트란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스치듯 지나쳐 사라진 것들이 알게 모르게 흔적을 남기고, 후회는 그저 눈에 띄는 한 종류일 뿐이다. 후회가 남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한 때 마음을 함께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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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큐/쿠로츠키] 낙홍(落紅)

연성질/안녕큐 2016. 2. 12. 00:38

*폰작업 저퀄, 캐붕 주의. 낙엽에 츠키시마의 첫사랑을 이입해주세요!
*쿠로오와 츠키시마는 여름합숙 때부터 사귀었다는 전재입니다!

 “벌써 2년째네, 우리 만난 거.”

 “그렇네요. 쿠로오씨랑 2년이나 만나게 될 줄이야.”

 “2년이나 됐으니까 이제 그만둬도 괜찮잖아? 오래 만났으니까.”

그의 이별선고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는 표현은 확실히 과장이었을까. 오히려 모두가 이상하리만치 정상적이다. 쿠로오씨가 먼저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다소 놀랐지만, 그게 전부. 고작 고교시절의 연애를 가지고 슬퍼한다거나 미련을 갖는 쪽이 오히려 웃긴 것이다. 언제라도 준비했다는 듯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가고, 나는 홀로 남아 쇼트케이크를 먹었다.

 “... 맛 없네.”

 모두 내버려둔 채 나와버렸다. 그 카페에 남은 것은 먹다 만 쇼트케이크 이외에도 많았지만, 나는 모른척 고개를 돌렸다. 마음을 가볍게 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랬기에 이것, 저것을 챙겨나올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핸드폰을 들었다. 그렇게 싫다고 거부하던 배경의 쿠로오씨를 어쩐지 나는 바꿀 수가 없었다. 전원 버튼을 길게 눌러 핸드폰을 꺼버렸다. 심심할 때, 쿠로오씨가 생각날 때 즈음이면 어김없이 울리던 것이 잠잠할 테니까. 사람도 이 같다면 좋을텐데.

 정말 금세 잊혀졌다. 고3이니까 공부라던가, 마지막이 될 배구에 집중해서일까. 아니, 어쩌면 애초에 쉽게 지나갈 사람이었을지도. 그랬으니까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버린 거겠지.

 “츳키! 오늘은 네코마 주장 만나러 안 가?”

 “아, 헤어졌어.”

 “헉. 미, 미안!”

 “괜찮아, 별 거 아닌데.”

 “별 거 아닐리 없잖아, 2년이나 만났는데.”

 “괜찮다니까?”

 “괜찮다면 왜 아직 핸드폰 꺼 놓은 건데?”

 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야마구치의 말 때문이 아니라 그저 핸드폰에 무언가 온 것 같아서. 꺼내려고 손을 움직이다 그만두었다. 여전히 꺼져있는 핸드폰이 울릴리가 없잖아. 스스로 전원을 꺼 놓은 주제에 도대체 무슨 연락을 기대하는 거야.

 “별 거 아니라면 아닌 거잖아.”

 “... 응, 미안해, 츳키..”

 야마구치가 잘못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맞는 이야기만 했는 걸. 그렇지만 어딘가 잔뜩 꼬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전히 핸드폰을 꺼 놓는 이유를 잘 알고 있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심한 녀석이다. 켜버린다면 곧바로 그에게 전화해서 왜 내게 헤어지자고 했는지 따질지도 모른다. 그걸 물어서 쿠로오씨에게 어떤 것이든 답을 듣는다면 어쩔건데. 다음을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은 해서는 안돼. 나는 그 모든 리스크를 감수할 자신이 없으니까.

 사랑에 빠진 순간, 인간은 변한다. 지금껏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푸르던 나뭇잎이 붉게 물든 시점에서야 내가 사랑에 빠졌음을 깨달았고, 우리가 늘 갖고 있던 온도차는 한 쪽이 달아오르면 다른 한 쪽은 식어버리는 것이었다. 비로소 마음을 깨달은 때는 너무 늦어버렸다. 그리고 단풍은 떨어질 차례만을 기다린다.

 “쿠로오씨.”

 “아.. 츠키시마.”

 츳키도, 케이도, 안경군도 아닌 츠키시마. 누구에게나 불려지던 나의 성이 이토록 듣기 싫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는 운동을 열심히 하는지, 살이 조금 빠진 것 같았고 늘 하고있는 뻗친 새집머리가 아닌 단정한 꼴을 하고 있었다. 여자라도 만나려는 듯이. 난 지금 누구에게 이렇게까지 화가 난 거지? 뭐가 이렇게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건데. 도대체 왜야.

 “잘 지내시는 것 같네요. 그럼 가볼게요.”

 아마도 번호가 바뀔 때까지 핸드폰을 켜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없으니까.

 바람이 불었다. 나뭇가지에 붙어 흔들리던 잎들이 그에 맞추어 떨어졌다. 개중에는 새빨갛게 물들어진 몸을 잔뜩 웅크린 것도 있었다. 바스락- 작은 소리에 부서져 흩어지는 그런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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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큐/쿠로스가] 인어공주야.

연성질/안녕큐 2016. 2. 8. 03:11

 나는 언제나 너의 한 발 뒤에 있었다. 흔들리는 은발의 뒷통수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좋았다. 자신의 토스가 끝끝내 득점으로 연결되었을 때에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시들게 하는, 오로지 자신만이 반짝거리는 미소를 보였다. 너희 까마귀는 이해할 수 있잖아? 나는 그 반짝임이 갖고싶었다. 너를 온전히 독점하고 싶었다. 그러나 네 곁에는 언제나가 있었다. 잠시도 네 곁에서 떨어지지 않아, 너를 감상하는 것을 지독하게 방해하였다. 단 한순간. 네가 벤치에, 그가 코트에 있는 순간을 제외하고.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 사이에 있어서 사라져야할 존재였다. 준비를 거듭하였다. 나는, 이를 위해서, 언제나 너희의 너의 한 발 뒤에 있었다.

 “다이치!”

 “뭣들 해, 빨리 구급차 불러!”

 왜 그런 표정이야, 스가와라. 우리의 방해물이 없어진 이 시점에 가장 행복해야 할 사람은 바로 너와 나인 걸. 나는 어느 누구도 죽이지 않아. 내 소유물이 아닌 이상 그런 취미 없어. 그저 날개를 꺾었을 뿐이야. 날 수 없는 새는 더 이상 쓸모가 없잖아? 그러니 나를 봐. 내게 고개를 돌려라. 어미 잃은 아기새를 어떻게 대해야하는 지에 관한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넋이 나가 벤치에 앉아있는 너에게 다가가 무겁게 한마디를 내뱉으면 될 일이었다.

 “미안해, 내 잘못이야.”

 “... 괜찮아. 경기 도중에 일어난 일이고, 다이치라면 분명히 다친 쪽이 네가 아니라 다행이다- 라고 했을테니까.”

 웃으며 내 등을 토닥이는 너의 목소리에 어딘가 슬픔이 어렸다. 한층 더 아름다워졌을까나. 그 이후로 나는 너와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운명이랄까, 그의 병원에 가면 언제나 너를 마주쳤으니까. 너는 언제나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 말은 마치 자신에게 내뱉는 말 인 것 같았다. 언젠가 말 없이 안아주었을 때에는 내게 기대어 울음을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어느 쪽으로 보나 결과는 오케이였다. 이번에는, 두 다리를 잘라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쿠로오?”

 “아, 왔어, 스가?”

 그 이후로는 예정된 일 그대로였다. 나의 노력 끝에 너는 그 마음을 알아주었고, 천천히, 조금씩 나는 너의 삶에 녹아들었다. 한 때 의 것이었던 반짝이는 구슬이 바로 눈 앞에 놓어졌다.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절대 서두르지 않아. 두 번의 실패는 없어. 기다리고 기다리니 금세 해가 떨어졌다. 고요한 어둠이 깔린 도시야말로 고양이의 집. 한 번 봐둔 사냥감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인어공주 스가와라. 내게도 토스를 올려, 그 환한 미소를 보여줘. 나의 배구는 너와 함께이고 싶어. 응, 나와 함께해줄래?

 너는 수줍게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아아- 드디어 눈부신 별빛 하나가 내 손에 들어왔구나. 왕자 따위는 관계 없어, 애당초 인어에게 다리를 갖고 싶어- 라는 빌미를 제공하지 않으면 되는 거야. 그렇담 애써서 도망칠 다리를 잘라내거나, 미움을 사 괴로워할 필요가 없어. 나는, 나를 사랑해주는 네가 좋아. 그런 너를 갖고 싶었던 거야. 네가, 너의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내게,

 “쿠로오...?”

 흐릿한 너의 눈이 제 색을 찾더니, 짙은 눈물방울을 툭툭 떨어뜨린다. 붉은 빛에 엉켜진 회색 머리칼이 아름답다. 스가와라, 내가 갖고 싶은 것은 반짝이는 너의 구슬픈 목소리야. 빛을 잃기 직전의 감미로운 비명. 너라면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그렇지? 자, 인어공주야. 이제 네 목소리를 들려주렴.

_

 코즈메 켄마. 스가와라 코우시.

 “아카아시!”

 “아, 오셨습니까. 보쿠토상도 금방 도착할 겁니다.”

 안녕, 인어공주야.

 

+)

 안녕, 켄마. 보고 있어? 친구가 생겨서 더는 외롭지 않겠네. 팔도, 다리도 없지만 너는 여전히 아름다워. 내가 가진 모두를 통틀어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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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큐/쿠로츠키] 해답

연성질/안녕큐 2016. 2. 5. 02:09

바보 같기는.

 

 추운 날씨에 연습 오프. 도쿄는 눈이 왔을까. 나랑은 관계 없는 일이잖아. 생각과는 다르게 발걸음이 도달한 곳은 네코마 고교의 앞이었다. 이런 거 예정 외의 일이라고.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집에 도착해서 쇼트케이크를 먹고 있어야하는 거잖아. 하얗게 질린 손으로 꽉 쥐어든 케이크 상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교문 앞을 서성거렸다. 엄청나게 수상해보여. 도대체 이곳에 뭐하러 온 건데.

 

“멍청이 짓 그만하고 돌아가자.

 

 최근 너무 바보들이랑만 지내서 그런 거야. 나까지 이상해진 것 같네. 목까지 올려 잠근 져지에 얼굴을 묻고 몸을 돌렸다. 아주 천천히 한 발자국을 떼어냈다. 이상하네. 도대체 뭘 기다리고 있는 거야, 뭘 기대하고 있는 건데. 생각대로 몸이 따라주지는 않았다. 느릿하게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겨우 교문 근처를 벗어났으려나. 어쩐지 나는 자꾸만 그와 관련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고작 합숙에서 몇 번 마주친 것이 전부인데.

 

‘안경군, 자유 연습 도와줘.’

 

 얼굴이 화끈거렸다. 히나타만큼이나 단순무식해 보였는데, 배구 공을 쥐었을 때의 모습은 또 다르다. 의기양양하게 보쿠토씨의 스파이크를 막아낸다 거나 다이치 선배나 할 법한 나이스 리시브를 보여준다 거나 알 수 없는 사람이라 불쾌한데도 자꾸만 눈길이 간다. 자유 연습 하자며 귀찮게 달라붙는 것도, 채찍과 당근이랍시고 사람 속을 긁어대는 것도 짜증나는 사람인 것이 분명한데도 나는 이 사람을 찾고 있다.

 

 

“어라? 안경군? 무슨 일이야 여기는?”

 

“아, 저, 그냥 지나가는 길에….”

 

“딸기 케이크? 의외네, 안경군.”

 

 완전히 아이 입맛이잖아? 놀림 받는 기분도 썩 나쁘지가 않다. 아, 어쩌면 나 M일지도. 이거 굉장히 어이 없는 생각이잖아?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나저나 정말 뭐하러 온 거야? 도쿄에는.

 

 잔뜩 엉켜진 실타래의 끝을 잡았다. 풀기 위해 애를 써도 보이지 않던 매듭이 명쾌하게 헤치워졌다. 인간은 참으로 단순한 동물이다. 부정하려 해 보아도 시스템 자체가 그렇게 생겨먹은 것을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감정이 이성을 잠재우고 모든 사고가 정지하면 그제서야 찾지 못한 답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뭐 하러 왔냐니, 그거 타나카선배 만큼이나 단순하고 명확한 거잖아.

 

“그런 건 됐고, 쇼트케이크 좋아하나요, 쿠로오씨.”

 

 답을 찾았다면, 적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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