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다이치] 잔재(殘在)

연성질/안녕큐 2016. 2. 6. 01:11

*카라스노가 전국 준결승에서 네코마에게 패했다는 전제의 이야기 입니다.

 30점이 넘어섰다. 목구멍에서 피맛이 나는 것 같았다. 기진맥진한 정신을 겨우 붙잡고 공을 응시했다. 힘겹게 살려낸 공격이 막히고, 또 다시 리시브에 매달렸다. 공이 날아온다. 지금 발을 내딛어도 늦을지 몰라. 0.1초. 그제서야 몸을 날렸다.

카라스노 敗

 바닥에 내팽개쳐진 공이 눈 앞으로 튀어올랐다. 고작 한 걸음, 1cm 앞에서 울려온 소리가 고막을 강타했다. 턱이 얼얼한 것이 바닥에 부딪힌 것 같다. 그러나 통증은 오히려 귓가에서 느껴졌다. 숨이 막혔다. 강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휘슬이 울렸다. ‘전국 우승’. 거대한 벽이 조그만 글자 사이를 가로막았다. 3년간 바라보며 달려왔던 정상이 한순간 사라졌다. 신기루 였을까나. 모두 헛된 시간이었어. 그렇게 나의 배구는 끝이 났다.

“카라스노 출신?”

“아, 네.”

“우와. 카라스노라면 그 배구강호? 대단하잖아, 다이치!”

 웃었다. 억지 웃음은 아니었다. 고작 몇 주 전의 그 날이 영화처럼 느껴져 우스웠다. 눈 앞에 떨어진 공이 여전히 생생하다. 바닥에 부딪혀 얼얼했던 턱의 감촉이 남아있다. 그러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고, 결말은 배드. 멍청한 주인공이 망설인 시간이 결국 실패를 빚은 영화.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 난 그것이 두려워 도망쳤다. 다시는 코트 위에 설 수 없겠지. 지쳐서 망설인 0.1초의 대가이다.

[다이치 잘 지내? 카라스노 갈 건데 같이 갈래?]_스가
[다이치상 연습 도와주러 오세요!]_노야

[바빠서, 미안. 나중에 함께 하자!]

 바쁘다니 뭐가. 배구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있는데. 그러나 더는 패배의 무게감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벗어나서 좋아. 진심으로.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모두를 비워내려고 노력했다. 잊기위해 뭐든 열심히 했다. 날씨가 후덥지근해졌을 때 즈음, 마음이 편해졌다. 그랬다고 여겼다. 과제를 마치고 뒤늦게 눈을 붙였다. 쉬고 싶었다. 눈이 떠진 시간은 5시.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뭉쳐진 잔해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목구멍에 먼지가 잔뜩 낀 듯, 매캐한 느낌이 들었다. 이를 내치기위해 들이킨 물이 씁쓸하다. 인터하이가 다가왔다. 카라스노는 정신없이 바쁘겠지. 더 이상은 나와 관계 없지만.

[오늘 3시에 네코마와 연습 있어요. 시간 있으면 와주세요.]_치카라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참을 그 문자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네코마.’ 그 한 마디에 불타올랐던 시간도 있었다. 1년 전, 타케다 선생님의 노력으로 겨우 닿았던 인연이 카라스노를 전국까지 이끌었다. 그러나 그 뿐이다. 우리는 네코마에게 패했고, 까마귀는 무대 위에 남지 못했다.

“어라? 사와무라? 이 학교 였어?”

“... 쿠로오?”

“이야, 이거 대단한 우연인데. 운명인가?”

 그의 실 없는 소리에 웃음지었다. 급하게 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불편해. 나는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보란듯 여전히 배구를 해왔다. 불편한데. 그 날의 기억이 나를 괴롭혔다. 더 이상 공을 만질 수 없었다. 코트에 설 수 없었다. 카라스노의 그들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근데 말야, 카라스노의 주장.”

 네코마를 향한 원망? 모든 원망은 나를 향했다. 쉬고 싶었다. 그 생각이 카라스노를 경기장 밖으로 내쫓았다. 나의 실수다. 내게는 더 이상 배구를 할 자격이 없어. 그런데, 그게 분명한데,

“안 갈 거야?”

하고 싶어. 코트 위에서 이전처럼 그들과 위를 보고 싶어.

_

 무겁게 문을 열어젖혔다. 이리저리 튕겨진 공. 체육관을 가득 메운 기합. 1년의 공백이 우스울 정도로 익숙했다. 본래 나의 것인양 그 소리들이 나를 반겼다. 꼭 그런 것만 같았다.

“사와무라 선배?”

“우왓, 진짜잖아! 다이치상!”

“다이치, 늦었잖아!”

 바보 같아. 헛된 시간일리 없잖아. 그만둘 수 있을리가 없지. 난 오직 배구 뿐이었는 걸.

“연습 좀 끼워줘. 오래 쉬었더니 몸이 근질거리네-”

 카라스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더 이상 이들과 함께 ‘다음이 없는 시합’을 뛰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두려워한 것은 그 쪽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여전히 이곳에 남아있다.

“그거면 충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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