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쿠로츠키] 그 남자의 사정

연성질/안녕큐 2016. 2. 14. 03:30
*폰작업 저퀄, 캐붕 주의. 쿠로오 자존감 낮음 주의.
*쿠로오와 츠키시마는 여름합숙 때부터 사귀었다는 전재입니다.

 안경 쓴 까칠한 녀석이었다. 자존심이 강해 조금만 건드려도 자극할 수 있는 쉬운 타입이면서도, 어딘가 단단히 어긋나 금세 손을 놓아버렸다. 그 알 수 없는 건조함에 관심이 생겼다. 여름 합숙의 짧은 기간에 관심은 더욱 깊은 감정으로 변하였고, 내가 내민 손을 그는 조금 망설이더니 기꺼이 잡아주었다. 손에 가득 채워지는 그의 온기가 따뜻했다.

 처음에는, 맞잡은 나의 손마저 놓아버릴까봐 걱정했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그의 손을 붙잡은채 매달려야할지, 아프지 않게 보내주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정말 쓸데 없는 걱정임을 알았다. 더욱 견고하게 조여오는 손가락 사이의 압박감이 적어도 나의 고백을 거절하지 못하여 사귀는 것은 아니라고 안심시켜주었다. 어른인척 구는 그가 이따금씩 내게 기대어 온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 그는, 항상 감추려하지만, 감정을 쉽게 들키는 타입이었다. 싸움도 없이, 단란한 연애였다. 츳키와의 연애는 매일이 행복했다. 나는 그 행복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츳키는 고등학생, 나는 성인이다. 공부에 치이는 그와 돈에, 학점에 허덕이는 나는 서로에게 소홀해질지도 모른다. 나는 지레 겁을 먹었다. 어느 순간 그가 도쿄에 오는 것을 껄끄러워하면 어쩌지. 나와 만날 시간이 사라지면 어쩌지. 과제에, 알바에 밀려 더 이상 츳키와 시간을 맞출 수 없으면 어떡하지. 그저 나의 노파심이었다. 우리는 문제 없이 앞을 향했다. 다만, 그는 고집이 강했고, 나는 그런 그에 대한 걱정을 잊으려 저런 의미없는 생각을 되뇌었을 뿐이다. 나로인해 츠키시마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포기해버릴 까봐. 그렇게 된다면 내 쪽에서 그를 놓아줘야할테니까.

 츳키가 고3이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사귀는 중이다. 그는 공부할 시간을 버리며 나를 찾았고, 나는 이기적이게도 그런 그를 거절하지 못했다. 가끔은 밤을 새워 피곤한 눈을 하기도 했는데, 오늘치 일을 몰아서 끝내느라 그랬다고 대답했다. 사랑의 시작은 어슬프기에 위험하다. 그는 온전치 못한 마음을 내게 주려다 조금씩 망가지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결심했던 말들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던 거짓을 내뱉었다. 그 여름날, 얼음이 녹아도 짙어, 씁쓸하던 커피 앞에서.

 “벌써 2년째네, 우리 만난 거.”

 “그렇네요. 쿠로오씨랑 2년이나 만나게 될 줄이야.”

 “2년이나 됐으니까 이제 그만둬도 괜찮잖아? 오래 만났으니까.”

 2년이나 만났으니 헤어져도 좋다니. 우습지도 않은 말을 내뱉고는 일어섰다. 넘쳐 흐르던 감정은 그 작은 커피잔에 몰아넣고 모두 녹여냈으니 더는 신경쓸 것도 없다. 츳키는 뭐든 철저하니까 내가 없다면 더는 망가지는 일도 없을 것이고, 분명 금세 좋은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은 성숙해진 것으로 진짜 사랑을 이룰 것이다. 나와의 연애는 그저 성장을 위한 연습 경기였으니까. 배구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다음이 없다는 것, 정도일까.

 츳키가 보고 싶어지면, 욕심 내지 않은 자신을 탓했다. 가끔씩, 술에 취할 때 라던가, 모른 척 그에게 전화를 걸면 항상 꺼져있는 츳키의 핸드폰이 그를 대변해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너무 힘들어서, 나와의 이별이 못견디게 괴로워서 아프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식 속 그는 여전했다. 다행이야. 분명 그게 맞는데, 어쩐지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서운하긴 하네.

 오늘은 억지로 이끌려 나갔던 소개팅에서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누군가를 소개 받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고는 멋있게 도망쳤다. 츳키와 헤어진 계절은 여름이었는데, 어느새 바닥에는 낙엽이 잔뜩 깔려있다. 그 날 이후로 그 카페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커피에는 입도 댈 수 없었다. 그를 잊기위해 모든 추억을 돌고 돌아 피했다만, 언제나 가장 최악의 순간에 마주쳐 나를 주저앉게 만들었다. 오늘, 바로 지금처럼.

 “쿠로오씨.”

 머리가 멈추어 버렸다. 가끔 시험지를 보고서 이랬던 경험이 몇 번 있지만, 오늘은 유난히 당황스러웠다. 심장 소리에 묻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조금 마른, 그렇지만 여전히 심술궂은 그 얼굴이 반가워 울음이 터져나올 뻔 했다. 아, 츠키시마. 바보 같은 호명이 내 최선의 대답이었다. 성대가 제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을 간신히 꺼내어 내뱉은 말이니까.

 “잘 지내시는 것 같네요. 그럼 가볼게요.”

 츳키가 너무나도 의연해서, 당황해서 머리까지 멈추었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눈 밑이 따끔거리고, 목구멍이 꽉 막혀 아팠다. 그가 걸어온 길을 따라 반대편으로 멀어졌다. 돌아보지 않는다. 미련 갖지 않는다. 이 끔찍한 카페 앞을 지나치며 나는 절대 울지 않는다.

 아마 내가 겪어본 상황들의 안에서, 후회하지 않는 선택은 없다. 어떤 것이든 반드시 끝에 다다르면 가슴을 치고 원망할 것이다. 그러나 그 옛날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이 선택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다른 어떤 선택들 보다 이것이 베스트란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스치듯 지나쳐 사라진 것들이 알게 모르게 흔적을 남기고, 후회는 그저 눈에 띄는 한 종류일 뿐이다. 후회가 남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한 때 마음을 함께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설정

트랙백

댓글

[하이큐/쿠로츠키] 낙홍(落紅)

연성질/안녕큐 2016. 2. 12. 00:38

*폰작업 저퀄, 캐붕 주의. 낙엽에 츠키시마의 첫사랑을 이입해주세요!
*쿠로오와 츠키시마는 여름합숙 때부터 사귀었다는 전재입니다!

 “벌써 2년째네, 우리 만난 거.”

 “그렇네요. 쿠로오씨랑 2년이나 만나게 될 줄이야.”

 “2년이나 됐으니까 이제 그만둬도 괜찮잖아? 오래 만났으니까.”

그의 이별선고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는 표현은 확실히 과장이었을까. 오히려 모두가 이상하리만치 정상적이다. 쿠로오씨가 먼저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다소 놀랐지만, 그게 전부. 고작 고교시절의 연애를 가지고 슬퍼한다거나 미련을 갖는 쪽이 오히려 웃긴 것이다. 언제라도 준비했다는 듯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가고, 나는 홀로 남아 쇼트케이크를 먹었다.

 “... 맛 없네.”

 모두 내버려둔 채 나와버렸다. 그 카페에 남은 것은 먹다 만 쇼트케이크 이외에도 많았지만, 나는 모른척 고개를 돌렸다. 마음을 가볍게 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랬기에 이것, 저것을 챙겨나올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핸드폰을 들었다. 그렇게 싫다고 거부하던 배경의 쿠로오씨를 어쩐지 나는 바꿀 수가 없었다. 전원 버튼을 길게 눌러 핸드폰을 꺼버렸다. 심심할 때, 쿠로오씨가 생각날 때 즈음이면 어김없이 울리던 것이 잠잠할 테니까. 사람도 이 같다면 좋을텐데.

 정말 금세 잊혀졌다. 고3이니까 공부라던가, 마지막이 될 배구에 집중해서일까. 아니, 어쩌면 애초에 쉽게 지나갈 사람이었을지도. 그랬으니까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버린 거겠지.

 “츳키! 오늘은 네코마 주장 만나러 안 가?”

 “아, 헤어졌어.”

 “헉. 미, 미안!”

 “괜찮아, 별 거 아닌데.”

 “별 거 아닐리 없잖아, 2년이나 만났는데.”

 “괜찮다니까?”

 “괜찮다면 왜 아직 핸드폰 꺼 놓은 건데?”

 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야마구치의 말 때문이 아니라 그저 핸드폰에 무언가 온 것 같아서. 꺼내려고 손을 움직이다 그만두었다. 여전히 꺼져있는 핸드폰이 울릴리가 없잖아. 스스로 전원을 꺼 놓은 주제에 도대체 무슨 연락을 기대하는 거야.

 “별 거 아니라면 아닌 거잖아.”

 “... 응, 미안해, 츳키..”

 야마구치가 잘못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맞는 이야기만 했는 걸. 그렇지만 어딘가 잔뜩 꼬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전히 핸드폰을 꺼 놓는 이유를 잘 알고 있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심한 녀석이다. 켜버린다면 곧바로 그에게 전화해서 왜 내게 헤어지자고 했는지 따질지도 모른다. 그걸 물어서 쿠로오씨에게 어떤 것이든 답을 듣는다면 어쩔건데. 다음을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은 해서는 안돼. 나는 그 모든 리스크를 감수할 자신이 없으니까.

 사랑에 빠진 순간, 인간은 변한다. 지금껏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푸르던 나뭇잎이 붉게 물든 시점에서야 내가 사랑에 빠졌음을 깨달았고, 우리가 늘 갖고 있던 온도차는 한 쪽이 달아오르면 다른 한 쪽은 식어버리는 것이었다. 비로소 마음을 깨달은 때는 너무 늦어버렸다. 그리고 단풍은 떨어질 차례만을 기다린다.

 “쿠로오씨.”

 “아.. 츠키시마.”

 츳키도, 케이도, 안경군도 아닌 츠키시마. 누구에게나 불려지던 나의 성이 이토록 듣기 싫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는 운동을 열심히 하는지, 살이 조금 빠진 것 같았고 늘 하고있는 뻗친 새집머리가 아닌 단정한 꼴을 하고 있었다. 여자라도 만나려는 듯이. 난 지금 누구에게 이렇게까지 화가 난 거지? 뭐가 이렇게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건데. 도대체 왜야.

 “잘 지내시는 것 같네요. 그럼 가볼게요.”

 아마도 번호가 바뀔 때까지 핸드폰을 켜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없으니까.

 바람이 불었다. 나뭇가지에 붙어 흔들리던 잎들이 그에 맞추어 떨어졌다. 개중에는 새빨갛게 물들어진 몸을 잔뜩 웅크린 것도 있었다. 바스락- 작은 소리에 부서져 흩어지는 그런 것도 있었다.


설정

트랙백

댓글

[하이큐/쿠로츠키] 해답

연성질/안녕큐 2016. 2. 5. 02:09

바보 같기는.

 

 추운 날씨에 연습 오프. 도쿄는 눈이 왔을까. 나랑은 관계 없는 일이잖아. 생각과는 다르게 발걸음이 도달한 곳은 네코마 고교의 앞이었다. 이런 거 예정 외의 일이라고.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집에 도착해서 쇼트케이크를 먹고 있어야하는 거잖아. 하얗게 질린 손으로 꽉 쥐어든 케이크 상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교문 앞을 서성거렸다. 엄청나게 수상해보여. 도대체 이곳에 뭐하러 온 건데.

 

“멍청이 짓 그만하고 돌아가자.

 

 최근 너무 바보들이랑만 지내서 그런 거야. 나까지 이상해진 것 같네. 목까지 올려 잠근 져지에 얼굴을 묻고 몸을 돌렸다. 아주 천천히 한 발자국을 떼어냈다. 이상하네. 도대체 뭘 기다리고 있는 거야, 뭘 기대하고 있는 건데. 생각대로 몸이 따라주지는 않았다. 느릿하게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겨우 교문 근처를 벗어났으려나. 어쩐지 나는 자꾸만 그와 관련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고작 합숙에서 몇 번 마주친 것이 전부인데.

 

‘안경군, 자유 연습 도와줘.’

 

 얼굴이 화끈거렸다. 히나타만큼이나 단순무식해 보였는데, 배구 공을 쥐었을 때의 모습은 또 다르다. 의기양양하게 보쿠토씨의 스파이크를 막아낸다 거나 다이치 선배나 할 법한 나이스 리시브를 보여준다 거나 알 수 없는 사람이라 불쾌한데도 자꾸만 눈길이 간다. 자유 연습 하자며 귀찮게 달라붙는 것도, 채찍과 당근이랍시고 사람 속을 긁어대는 것도 짜증나는 사람인 것이 분명한데도 나는 이 사람을 찾고 있다.

 

 

“어라? 안경군? 무슨 일이야 여기는?”

 

“아, 저, 그냥 지나가는 길에….”

 

“딸기 케이크? 의외네, 안경군.”

 

 완전히 아이 입맛이잖아? 놀림 받는 기분도 썩 나쁘지가 않다. 아, 어쩌면 나 M일지도. 이거 굉장히 어이 없는 생각이잖아?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나저나 정말 뭐하러 온 거야? 도쿄에는.

 

 잔뜩 엉켜진 실타래의 끝을 잡았다. 풀기 위해 애를 써도 보이지 않던 매듭이 명쾌하게 헤치워졌다. 인간은 참으로 단순한 동물이다. 부정하려 해 보아도 시스템 자체가 그렇게 생겨먹은 것을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감정이 이성을 잠재우고 모든 사고가 정지하면 그제서야 찾지 못한 답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뭐 하러 왔냐니, 그거 타나카선배 만큼이나 단순하고 명확한 거잖아.

 

“그런 건 됐고, 쇼트케이크 좋아하나요, 쿠로오씨.”

 

 답을 찾았다면, 적어내야지.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