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워치/레예맥] Sunset.

연성질/☆ 2017. 1. 14. 19:22

 

 

 

제시 맥크리는 꿈을 꾸려는 참이다. 비행기는 에스파냐를 향하고 있다. 혼잡한 짐칸에 몸을 구겨 넣은 채로 불편하게 누워있지만, 지친 그에게는 그런대로 괜찮은 자리다. 실제로 지친 쪽도 몸보다는 다른 곳이었으니까. 그저 그곳이 적당한 회상을 곁들여 추잡한 꿈을 이어가기에 충분하다는 의미이다.

오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재소집이라는 거창한 명분이 제시를 이끌었다. 옛 전우들을 보기 위해서 그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아주 필수적으로. 감긴 눈과 그의 의식이 잠식됨에 따라 그리웠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거칠고 저밖에 모르는 성격과 꼭 닮았던 그 목소리가 세월만큼이나 흐릿하게 제시의 귀를 감싸 안았다.

 

명심해라, 얼간아. 무거운 이름을 얹고 싸우는 거다. 오버워치는 너희 갱 놀음과는 달라.’

오버워치. 잊은 듯 살았던 이름이다. 사실 그리 반갑지 않기도 하고. 한 번 정의를 잃었던 것이 다시 세워진들 다를 게 있을까.

 

우습지도 않군, 애송이. 네가 그렇게 잘났다면 왜 진작 나를 죽이지 않았나?’

그래, 나는 지금 당신에게 묻고 있는 거야.

 

제시는 사람이 잠들지 않고도 이토록 완벽히 꿈속에 사로잡힐 수 있음에 여러 번 감탄해야만 했다. 무의식이 그를 지배할수록 그의 정신은 더욱이 또렷해졌다. 자세를 바꾸고 몸을 들썩이며 벗어나려했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편한 자세를 찾아도 불편했고, 억지로 꿈을 깨려하면 오히려 빠져들었다. 그 부조리함은 그가 이 모든 모순의 근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금세 사라졌다. 우스꽝스러운 카우보이모자로 얼굴을 완전히 가려버린 사내는 낮게 욕을 읊조렸다.

 

이제 다 늙어빠졌겠군,”

 

가브리엘은 무슨, 망할 레예스.

 

 

유능한 총잡이의 귀환이구만. 하하! 환영하네, 친구.”

여전히 건강하시군요, 라인하르트.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모자를 벗고 격식 있게 인사하려는 맥크리를 끌어당기고는 호탕하게 웃는 늙은 기사는 아무래도 여전히 영웅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더불어 사람을 뭉개버릴 듯 끌어안는 근력도 여전해 보인다고, 제시는 생각했다. 그 단단한 품에서 겨우 벗어나 안으로 들어가자 그런대로 익숙한 얼굴들이 시끄럽게 저를 반긴다. 예나 지금이나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달려와 안기는 옥스턴이나 격식 있는 사이보그의 목소리, 혹은 다소 흥분한 고릴라의 음성.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향수를 이끈다만 제시 맥크리는 다른 것을 찾고 있었다. 좀 더 단단하고 새카맣고 심술궂은 무언가. 늦었다며 망설임 없이 제 머리통을 휘갈겨 줄 누군가. 비행기에서 지겹게 자신을 괴롭혔던 그 목소리를,

 

조금 늦었군요, 맥크리.”

주인공은 항상 느지막이 등장하는 법이지.”

 

안 그래도 당신을 찾고 있었어, 치글러.

정확히는 그녀를 찾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행방을 알려줄만한 인물을 찾고 있던 것이지만 피차 다를 것도 없었다. 그는 능청스레 옛 전우인 천사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이봐, 친구. 잠시 시간 좀 내줄 수 있지?’ 그녀는 흔쾌히 제시의 요청에 응했다.

제시는 치글러의 방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라이벌인 금빛 머리칼 역시 보이지 않았다. 바쁜 양반들이니 어딘가 잠시 다녀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다 늙어빠진 모습을 들키기 싫어서 숨어있다거나. 한심하기는, 제시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커피, 드실 거죠?”

물론이지. 실력이 녹슬지는 않았는지 봐야겠어.”

못 쓰게 만드는 것에는 영 소질이 없어서요, 당신과는 다르게.”

……,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맛이군.”

 

따뜻한 커피는 세월이 무색하리만치 그대로였다. 맛으로 보나, 만든 이로 보나. 그는 찬찬히 커피를 마시며 제가 자리한 공간을 둘러보았다. 탁자 위에 어지러이 널브러진 탈론의 자료, 그 안의 시커먼 누군가.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뒤집어쓰고는 어딘가 익숙한 총을 양 손에 쥐고 있는……, 넋을 놓고 자료를 바라보다가 손에 조금 커피를 흘리고야 말았다. 따뜻한 느낌이 퍼졌다. 치글러는 여전히 덤벙댄다고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 때쯤에서 제시는 작은 의아함이 생겼다. ‘따뜻한 커피.’ 마치 그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린 것 같은, 막 끓여진 커피. 마치 기지에 도달하자마자 자신을 찾을 거란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던 느낌이다. 그 이질감을 잘근거리던 그는 답지 않게 동요하는 차가운 스위스 여인의 눈을 보았다. 꾹 다물어진 입술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진실을 애써 누르고 있는 듯 보였다.

 

메르시.”

오랜만인 이름이군요. 정말.”

 

분명 다르다. 앙겔라 치글러는 비밀을 숨기고 있다. 아니지, 털어놓고 있다. 의도치 않게 제시만을 향했던 거짓과 비밀을 뱉어내려 하고 있다.

그녀는 굳세게 탁자 위로 종이 뭉치를 내려놓았다.

 

스위스 기지의 폭발, 잭 모리슨과 가브리엘 레예스의 죽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레예스가, 사라졌다고, 그가. 제시 맥크리를 두 번이나 오버워치로 이끈 그가(직접 불러낸 것은 한 번 뿐이었지만), 레예스가. 그러니까 더는 없다고, 오버워치에. 이 세상에.

제시는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짙은 커피를 급하게 들이켰다. 담배가 생각났지만 이곳은 치글러의 방이니 참기로 했다. 그는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읽었다. 뇌가 기능을 멈춘 것 같았다. 금연을 해야 하나,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도 와 닿지 않았다. 제시에게 가브리엘 레예스는 무슨 짓을 해도 죽지 않는 불사신 같은 존재였다. 그런 인간이 죽었다니, 그것도 흔적도 없이. 납득하지 못 할 만한 문제였다.

 

당신이 재미난 소설 쓰기에 소질이 있는 줄은 몰랐군.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되나?”

제시.”

 

그녀의 강한 눈빛이 제시의 내장을 끄집어내는 것 같았다. 좀 전까지 맛있게 마셔대던 커피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도 같았다.

 

알았어. 제대로 알아먹었다고. 예나 지금이나 무책임한 건 여전한 인간이로구만. 그에 딱 어울리는 명예롭지 못한 죽음이었고.”

 

그는 일어서 천천히 밖을 향했다. 화를 내고 있었다. 제시 맥크리의 방식은 아니다만, 고요함 속에서 분노하고 있었다. 대상은 불분명하다. 준비할 겨를도 없이 진실을 강요한 치글러, 멋대로 멍청한 죽음을 맞아버린 레예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들떠 있었던 멍청한 맥크리, 자신.

 

한심하기는. 멍청함은 스승한테 물려받은 유산인가보지?”

 

모두를 향하였지만, 누구도 향하지 않았다.

 

 

거기 얼빠진 놈,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죽음이다.”

지금 나를 걱정해주는 겁니까? 그 대단한 레예스 사령관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럭키가이가 바로 나였구만?”

계속 헛소리를 할 생각이라면 지금 당장 비행기에서 내려도 좋은데,”

무서운 소리, 아직 공중이잖아요. 당신, 내게 하늘을 나는 기술은 가르쳐주지 않았다고요.”

 

사령관의 목구멍에서 걸쭉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오자 젊은 카우보이의 얼굴에도 만족스런 웃음이 자리했다. 제시는 마음속으로 감옥에서 썩을 바에야 적이었든, 원수였든, 정의구현을 떠들어대는 기관을 돕겠다.’고 말한 과거의 철없는 자신을 칭찬했다. 아마 제 인생 중에서 가장 잘 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 의견에 레예스는 그다지 깊게 공감하는 것 같지는 않다만, 긍정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커먼 지하 독방에서 몸에 곰팡이나 피우고 있는 삶보다는 낫지 않겠느냐고 덧붙이기도 하였다. 제시는 그 표현마저도 대장답다며 너털웃음을 보였다.

그렇지만 맥크리가 이전의 선택을 자신의 최고로 꼽는 데에는 다른, 보다 명확한 이유가 존재했다. 그는 자연스레 늘 화나 보이는 험상궂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숨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 했다.

 

상관의 낯짝을 보고 웃어대는 건 그 상관이 우습게 보인다는 뜻인가?”

그 배려 없는 얼굴로 화까지 내면 내가 얼마나 무서울지는 생각 안 해줍니까?”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인지, 한 번을 가만히 듣고 넘기는 법이 없군.”

내게 이런 걸 가르칠만한 사람이 레예스 당신 말고 또 누가 있답니까?”

하여간 글러먹은 꼬맹이. 그가 아프지 않게 제시의 머리를 툭 치면 애써 참고 있던 웃음이 그에 맞춰 터져 나온다. 통증 하나 없는 부근을 부러 비벼대며 묻는 목소리는 퍽 장난스럽다.

 

안 그래도 나쁜 머리 더 나빠지면 당신이 책임지는 겁니까?”

아니. 지금보다 더 나빠지면 못 쓸 테니 가져다 버려야지.”

, 매정하잖아요, 그거! 다 당신 탓인데!”

날 때부터 멍청하던 돌대가리를 왜 나의 책임으로 넘기는 건지 모르겠군.”

, 대장!”

 

 

아무래도 더 이상 젊은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 카우보이가 슬 웃어보였다. 즐거운 기억 한 편에 항상 자리한 그 사람을 찾아야만 했다. 하다못해 그 흔적이라도.

제시는 그 길로 스위스기지를 향했다. 여직 제대로 남아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오로지 그 생각 하나로 도착한 곳은 자신이 알던 모습과 꽤 달랐다. ‘두 영감이 아주 제대로 화딱지가 나셨던 모양이네.’ 온통 일그러지고 망가진 기지를 보며 속으로 한탄하였다. 무엇이 제시 맥크리의 발걸음을 그리 재촉했던 것일까. 머물렀다면,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면 그 성질 나쁜 상관을 막을 만한 사람이 바로 제가 아니었을까. 괜한 후회가 밀려왔다. 그는 말없이 황무지 위를 걸었다.

 

…….”

 

생생한 흔적. 좋을 대로 부서진 것들과 그것들 사이에 여전히 짙게 남은 핏자국들. 치글러가 건네준 자료에서 본 것과 꼭 똑같은 모습의 익숙한, 그렇지만 한없이 낯선.

 

이곳에 레예스가 있었다.

 

그 시커멓고 인상 더럽고 늘 제게 못돼먹었던, 말만 하면 콧잔등을 찡그리며 저를 째려보기 일쑤였고 알아먹기 힘든 걸걸한 목소리로 욕을 내뱉기나 하던, 대장인 주제에 칭찬이나 격려하는 법을 몰라서 서투르게 머리통을 후려치기나 하고 꼴에 꽤나 멋있는 웃음을 내보이던, 가브리엘 레예스. 피투성이, 죽어가던 레예스. 그가 이곳에 있었다.

제시는 도저히 그의 멸망을 믿지 못했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브리엘 레예스가 제시 맥크리의 전부를 갖고 있었기 때문, 그 뿐이다.

 

멍청하기는.”

 

돌아갈 시간이다. 과거에 잡혀있다 보면 쉽게 망령에게 정신을 빼앗기고는 한다. 제시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환기시키고는 무겁게 한 발을 내딛었다. 여전히 다소 부주의한 머리는 눈앞을 스쳐지나간 검은 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시체 썩은 내가 나는 것 같았다. 그는 그저 과도하게 신경 쓴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거 더할 나위 없이 맞는 말이군.”

 

그는 순간 너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조금 더 웅얼대고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였지만, 아무래도 제가 오버워치에 돌아오고 며칠이나 그리워했던 그것과 굉장히 비슷했다. 그러나 진짜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눈앞에는 잔해들이 보란 듯 펼쳐져 있었으니까.

 

이제는 환청까지.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맥크리.”

 

두어 번 고개를 강하게 휘젓고는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커다란 소음이 들렸는데, 총성음 같기도 하였다. 거기까지 파악되자 오른 팔이 떨어져 나갈 듯 욱신거렸다. 인상을 찌푸리고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제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는 계속되었다. 의수로 상처부위를 꾹 눌러 지혈해보기는 하였다만 역부족이었다. 이내 좀 전과 같은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왼 발목이 말썽이다. 뒤이어 왼팔과 의수의 연결부위, 왼쪽 옆구리를 향해 차례로 총알이 박혀왔다. , 하는 소리와 함께 중심을 잃고 고꾸라진 맥크리의 앞에 검은 연기가 뭉글거리다가 이내 사람의 형태를 하였다. 그냥 사람이라기에는 얼굴에 뒤집어 쓴 가면이 꽤나 우스웠지만 제시는 지금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고통에 잔뜩 구겨진 인상으로 그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 유령 같은 사람은 한 발을 제시의 가슴팍 위에 얹어놓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꼭 그런 것만 같았다는 의미이다.) 그는, 그러고 보니, 어디에선가 저렇게 생긴 사람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탈론, 리퍼. 검은 케이프를 두르고, 가면을 쓰고 있음. 검은 연기가 되어 이동할 때에는 데미지를 입힐 수 없음. 순간이동이 가능함. 전 오버워치 요원들과 오버워치에 관련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테러를 가하고 있음.’

 

치글러의 방이었군. 그 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는 중얼대듯이 말했다. 그 소리를 정체불명의 사내가 놓쳤을 리가 없다.

 

, 그 여자도 아직 살아있는 건가. 자비를 잃은 오버워치의 꼴이 궁금해지는군.”

당신……,”

이제야 눈치를 챘구나, 애송아. 꼴이 아주 가관이군.”

, 당신 거울은 보고 다니는 겁니까.”

 

제시는 하마터면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이것은 꿈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저의 우스운 망상일 수도 있다. 그를, 레예스를 그리워하기만 하다가 죽어가는 제시가 가여워 눈과 뇌가 힘을 합쳐 멍청한 환상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여전히 얼얼한 고통은 이것이 현실임을 여실히 깨닫게 해준다.

 

어떻게……, 당신이 어떻게,”

그야 네놈에게는 가르치지 않은 속임수로. 아마 앞으로도 알 일은 없을 테지. 옛 고향과 작별인사라도 나누지 그래.”

 

자신을 향해 겨눠진, 그 익숙한 총은 분명 전 블랙워치 사령관인 가브리엘 레예스의 것이다. 저 재수 없게 제시의 귓전을 때리는 목소리 역시 가브리엘 레예스의 것이다. 흐릿한 시야가 가면 너머의 얼굴을 꿰뚫는다면, 그 안에 감춰져 썩고 재생하기를 반복하는 것 역시 가브리엘 레예스의 것이다. 제시 맥크리는 저를 죽음까지 내몬 자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가브리엘 레예스라는 사실에 기뻐해야할지 원망스러워해야 할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것마저 간파한 리퍼는 제시의 머리를 향해 총을 두었다. 냉소적인 웃음과 함께 고개가 제시를 마주하였다. 제시는 그의 눈을 보고자 애썼지만 아무래도 보이지 않았다.

 

유언은 준비 되었나, 맥크리.”

 

그가 멋대로 오버워치를 뛰쳐나와, 단 한 번 후회한 적이 있다면 우연히 66번 국도를 지나칠 때였을까. 제 기억 속 늠름한 대장은 그곳을 스칠 때면 늘 인상을 구기고 내가 이곳에서 그 배은망덕한 자식을 주어왔지.’라고 투덜대고는 했다. 그 뒤통수에 대고 이렇게 잘난 대원을 얻어놓고 그런다며 우쭐댔었는데………. 그러고 보니 시간이 꽤나 지난 듯하다. 해가 기웃거리며 산 너머로 숨어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시 맥크리는 제 자랑스러운 카우보이모자를 조금 눌러쓰며 얼굴을 가렸다.

 

달리 남길 말이 있을 리가.”

 

눈을 꾹 감으며 생각했다. 석양이 지는군. 쓸쓸한 웃음이 그 자리에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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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큐/쿠로츠키] 세가지 소원Ⅰ

연성질/안녕큐 2017. 1. 11. 02:07

BGM ; 레드벨벳 - 세가지 소원

https://youtu.be/Bv1b5MzLIAM

*대학생AU입니다! 츠키시마와 쿠로오는 룸메이트입니다!

*오랜만의 연성이라 캐붕이 지려벌지만,, 메리 쿨츳데이,,,

 

 

   “어이, 케이. 늦잖아.”

   “쿠로오씨가 너무 일렀던 겁니다.”

 

   신년까지 쿠로오씨의 얼굴을 봐야하는 겁니까, 툴툴대면서도 쿠로오씨의 뒤를 따랐다. 송년이랍시고 보투토씨, 아카아시씨와 함께 모였던 날, 구해를 함께 보냈으니 새해도 함께 맞으면 좋을 것 같다고 대충 뱉었던 말이 실제가 될 줄이야. 담담히 지난 날을 곱씹으며 그와 발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그를 처음 만났던 것은 이제 한 손을 꼬박 다 접어야 닿을 날이다. 싫다던 나를 어거지로 끌어와 개인연습을 하게 만들고, 멋대로 이것저것 알려주더니 금세 좋을대로 부르며 연락처까지 가져갔었지. 그러다 이 정도 시간이 지나니 내게도 관록이 생긴 것인지 귀찮을 만큼 내게 관심이 많은 이 사람과 지금은 한 방을 쓰고 있을 정도이다. 면역력이 생긴다든가,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몸소 체험하게 해준 그를 어쩐지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곧잘 ‘휘둘린다’고 표현하고는 했는데, 이렇게 나를 제멋대로 휘두르는 사람은 (형인 아키테루를 제외하고,) 꼭 처음이었다.

   쿠로오 테츠로씨는 사악한 얼굴로 나를 곧잘 놀리고는 하는데, 이상하게도, 히나타나 카게야마에게 하듯이, 열 받는 만큼 시원하게 받아쳐내질 못한다. 또한 그의 일상은 보쿠토씨만큼이나 빈틈투성이인데, 경기 중에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고 치밀하다. 그것 뿐일까. 조금 쉴만 하면 다가와 '츳키―', '안경군', '케이!' 하는 식으로 귀찮게하고는 하는데 그게 어쩐지 싫지가 않다. 그리고 돌연, 잘난 체하며 웃어보이면 (아주 가끔이다만) 그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도 같다. 

   쿠로오 테츠로는 누군가 내게 인생에서 가장 이상한 사람을 고르라면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꼽을 그런 사람이다.

 

   “안경군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의외로 손이 많이 가는 타입인 거 알아?”

 

   밤공기는 쌀쌀했다. 옅은 겨울 냄새가 기분은 좋다만, 아무래도 추운 것은 별로였다. 조금 몸을 움츠린 채로 걷는데 그가 제 붉은 목도리를 풀러 매주었다. ‘연인 행세입니까.’ 볼멘소리로 물었지만, 따뜻한 기운에 달리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쿠로오씨 냄새. 얕게 숨을 들이마쉬다가 얼굴을 목도리 속으로 숨겼다. 금세 목도리의 붉은 색이 얼굴을 물들이는 듯 했다.

 

   “케이, 이제 금방이야. 뛰자!”

   “네? 자, 잠시만……!”

 

   손을 맞잡고 무작정 뛰어 도착한 신사 앞은, 한밤중인데도 북적거렸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그리고 또 누군가는 연인들과. 옹기종기 모여 웃는 이들 사이에서 어쩐지 이질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누구와 함께 신사에 온 걸까. 라이벌이자 동료였던 사람, 혹은 현재인 룸메이트.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케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다음 우리야.”

   “아, 네”

 

   실없는 생각. 나는 그것을 머릿속에서 떨궈내려 했다. 그러다 문득 돌아본 곳에 쿠로오씨가 보였는데, 신사 앞에 서서 무언가 간절히 손을 모으고 비는 그를 보며, 조금은 우습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곳에 빈다고 이루어질까. 속는 셈 치고, 이런 내 모습이 얼마나 바보같을지는 잘 알고 있지만, 생에 처음으로 간절하게 손을 모았다. 내 머릿속의 실없는 생각이 아주 터무니없는 헛소리가 되지만은 않게 해달라는 바람. 신따위 있을리가 없지 않냐고 떠들어대던 자의 소원을 이뤄줄리 만무하지만.

 

   “뭐라고 빌었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잖아요?”

   “아―, 치사해. 째째시마.”

   “히나타입니까? ……그러는 쿠로오씨는 뭐라고 빌었는데요.”

   “글쎄…,”

 

   바보같은 건 오히려 지금일까. 될 수 있다면 저 물음을 뱉기 이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신의 만능을 너무 과신하셨네요.’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답한 이후에도 속이 울렁이는 듯 했다. 그의 답이 날카롭게 속을 후벼팠다. 너무한 것 아니냐며 우는 소리를 해대는 그에게 얄밉게 웃으며 틀린 말도 아니지 않느냐 말했다. 정말로 틀린 것은 그가 아니라 자신임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자친구나 생기게 해주세요, 일까.’

 

 


 

 

  이번 신은 꽤나 관대한 존재였다.

 

   “아, 케이.”

   “여자친구입니까?”

   “어? 아니―,”

   “금세 이뤄졌네요, 소원. 잘됐어요.”

   “……그러게. 앞으로 매해 거기로 가야겠어.”

 

   저는 아마, 싫습니다. 그렇게 대답하지 못하고 그러든 말든 별 관계 없다는 듯 어깨나 으쓱해보였다. ‘데이트나 하세요.’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고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속이 메스꺼웠다. 덕분에 점심에 위 속으로 우겨넣었던 음식들을 모두 게워내야만 했다. 하루종일 울렁이는 속을 달래며 ‘괜찮다, 괜찮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위로를 되뇌었다.

 

   헤매던 시간은 어느새 해를 잃었고 달을 만났다. 그 날 손을 마주 잡고 뛰었던 그 길이, 오늘은 지루하고 길게만 느껴졌다. 한참을 걷고 또 걷자 한적하고 컴컴한 신사가 보였다. 오늘의 밤만큼이나 쌀쌀하고 쓸쓸한. 나는 느릿하게 그 위로 올랐다. 그리고는 다시 손을 모았다. 이 관대하되, 정직한 신을 향해서.

 

   “하나를 말하면 열은 알아주는 신이길 바랐는데, 그건 아니었나보네요. 아니, 그다지 불만은 없습니다. 그냥 혹시 제가 빠뜨린 게 있을까봐 왔어요.”

 

   ‘그의 시간에 내가 단 1분이라도 좋으니 자리하게 해주세요.’

 

   “별 건 아니고, 올해도 별 탈 없이 그와 함께하게 해주세요.”

 

   ―사치스런 욕심을 부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렇게나마 쿠로오씨의 곁에 계속 있을 수 있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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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큐/츠키야치] 사랑이었다

연성질/안녕큐 2016. 7. 17. 02:13

BGM ; 사랑이었다 태일

https://youtu.be/KVV5Yvr-0Bs

 

저기, 스가와라 선배.”

 

, 저기, , 졸업 축하드려요.”

 

하필 그 잠깐이었다. 사와무라들의 졸업식이 끝나고, 체육관 앞을 지나가던 중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던 노래가 끝나 다음 노래로 넘어가려던 그 짧은 순간, 츠키시마는 일주일 전부터 만지작거리던 작은 선물상자를 뒤에 숨긴 채 답지 않은 억지웃음을 짓는 야치를 보았다. 그리고는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만 남긴 채 가버린 스가와라를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그녀와 눈이 마주쳐버렸다랄까. 상자를 쓰다듬던 그녀의 동그란 눈이 커졌다가, 작아졌다. 눈물이 잔뜩 고인 붉은 눈으로 3초정도 츠키시마를 바라보더니 다급하게 상자를 숨겼다.

 

, , 그니까 방금 건 말이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위태로운 모습으로 애써 슬픔을 눌러 담는데, 츠키시마에게 그건 그거대로 신경 쓰였다. 자초지종을 듣는다거나 하는 일에는 분명히 관심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귀찮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미간을 아주 약간 좁히다 말고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그제야 야치는 울음을 터뜨렸다. 조용하지만 거대하게. 츠키시마로서는 그 거대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중심에 있는 저 작은 상자, 어째서 주지 못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여기에 담긴 내 마음까지 속이지는 말자고 생각했어.”

 

눈물과 콧물이 범벅 된 못생긴 얼굴로 웃으며 그렇게 답했다. 그 마음이 뭐 대수라고. 아마도 츠키시마는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자신보다 소중한 마음이라니, 평생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부쩍이나 가까워졌다. 야치야 원래 사교성이 좋은 편이었다만, 츠키시마의 태도가 사뭇 달랐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그녀에게 신경을 썼다.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그런 장면을 봐버린 탓이라고 단정 지었다만,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눈에 밟히는 이유라 하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해 줬으면 좋겠어란 그녀의 말이 어쩐지 자꾸만 생각 나 그 곁을 서성거리게 만들었다. 츠키시마는 항상 그녀를 바라보고 관찰했다. 이따금씩 보이는 굳은 표정 속에서, 그는, 그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웃지 않는 그녀는 새로웠다. 정확히, 그런 그녀를 보며 느껴지는 이상한 분함에 생소함을 느꼈다. 그 명확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츠키시마는 더욱 그녀에게 다가갔다. 두 번째 목격은 우연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 스가와라 선배!”

 

오래간만이지?”

 

그것보다 사실이냐고요, 키요코씨와의 관계!”

 

, , 그렇게 되어버렸네?”

 

그럼, , 얏짱은……,”

 

그 얘기는 좀 나중에 하자.”

 

몇 달 만에 찾아온 스가와라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둘은 단연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고 그에 대해서는 야치나 츠키시마도 불만이 없었다. 그래서 야치에 관한 이야기는 뭔데, 날이 선 눈빛이 코우시에게 닿았다. 어쩐지 말을 돌린 스가와라는 그의 눈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갔다. 목적을 잃은 눈빛은 돌고 돌아 노란빛 머리에 머물렀다. 밝게 빛나던 이전과 다르다. 전부터 한 번씩 느꼈던 이질감, 그날이 느껴졌던 그 얼굴. 츠키시마의 본능이 외쳤다. 그녀가 또 다시 울음을 터뜨릴 거야. 가서 달래줘, 네가 필요할 거야. 머뭇거리던 발 앞으로 작은 신발이 위치했다. 어느새 그 노란 머리카락들은 츠키시마의 눈앞에 위치해 있었다.

위로해 주고 싶어. 그 생각 하나로 츠키시마는 팔을 뻗었다. 달콤하게 그녀를 감싸 안았고 놀란 동그란 눈에는 금세 물기가 가득 서렸다. 야치의 작은 손가락이 그의 옷깃을 그러쥐었고 그대로 얼굴을 묻은 채 꽤나 오랫동안 훌쩍였다. 어쩐지 짜증난다거나 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귀찮고 성가시다는 느낌이 들지도 않았다. 단지 그녀가 빨리 울음을 그치고 웃어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신경 쓰이게 하는 것을 당장이라도 그만두길 바랐다. 그래서 츠키시마는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너무했어, 그치.”

 

……뒤통수라도 한 대 때려주지 그랬어.”

 

내가 무슨 수로.”

 

고개를 든 그녀는 다시 웃는 얼굴이다. 그 빠른 감정 변화를 츠키시마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고 느꼈다. 다만, 조금 전보다는 나아보이는 그녀의 기분이 썩 싫지만은 않았다.

 

츠키시마군은 무지 친절한 거 같아. 매번 이런 일도 해주고. 분명 좋은 남자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 ?”

 

좋은 남자친구라니 웃기지도 않아, 한심한 생각이라며 고개를 돌리던 찰나에 마침 야치는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밝은 미소를 보이던 참이다. 최근, 3학년들이 졸업한 이후로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진실한 웃음. 그것을 고작 10cm 거리에서 지켜보았다. 츠키시마는 왠지 그녀가 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달과 별이라니 꽤나 괜찮지 않나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내 바보 같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그 웃음만큼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야치 히토카는 다시금 자신을 되찾았다. 조금의 거짓도 없이 반짝반짝 빛나는 이전의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츠키시마는 이전보다 훨씬 이상해진 듯싶었다.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본다거나 이유 없이 얼굴을 붉히는 일이 많아졌다. 야마구치나 다른 사람들이 어딘가 아픈 것이 아닐까 걱정되어 물으면 덤덤하게 그런 거 없다며 대충 대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어디까지나 야치가 아니라는 가정 하에. 그녀가 물어오자 그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그리고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전혀 다른 것을 되물었다.

 

넌 이제 괜찮은 가봐?”

 

? 그 사람에 관해서라면 아마도. 행복할 테니까, 이제.”

 

지금 와서 츠키시마는 이런 그녀의 태도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해놓고는 행복해보이니까 괜찮다니, 그게 뭐야. 잔뜩 신경 쓰이게 만들어 놓고는. 그는 자신의 모든 고민과 골칫거리들이 그녀를 향해있다는 사실이 거북했다. 그 미묘한 감정이 자꾸만 그녀를 원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알 수 없어서 화가 났다. 츠키시마는 이 복잡한 마음의 정의를 몰랐다. 그것을 표현해낼 방법 역시 몰랐다. 자신을 자꾸만 궁지로 내모는 감정에 단지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바보 같아. 멍청한 짓이야. 그래선 아무것도 되지 않잖아.”

 

그 말은 흐릿한 달빛을 향해 날아갔다.

 

별 다른 일 없이 매일이 지나갔다. 이유 없이 그녀를 몰아세운 이후로 츠키시마는 오히려 곧잘 그 이외의 것들에 집중하여 지냈다. 진즉에 히토카를 밀어내고 잘라냈다면 이렇게 고민하고 힘들어 할 일도 없었을 걸, 괜히 사서 고생했네. 자신의 어딘가 깊이 묻힌 감정을 그는 아마 평생 모르고 살 것 같았다.

무료한 하루는 빠르게 흘렀다. 이제 그 고교시절은 한 줌의 모래 정도. 꽉 쥐어봤자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릴 뿐이다. 그 가운데 묘하게 남은 노란빛깔은 가끔씩 그에게 강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던 도중 히나타의 문자를 받았다. 동창회. 츠키시마는 한참이나 그 글씨를 바라보았다. 선배들이랑 카게야마랑 히토카도 온대. ‘히토카도.’ 한 번 쯤 가는 것도 괜찮겠지, 별로 바쁜 것도 아니고. 재밌게 보냈잖아, 배구 덕에. 괴짜 콤비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궁금하고. 결국 그 핑계들로 덮고 싶었던 것은 그녀의 이름 세 글자란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모든 것들을 부인하며 추억 속으로 발을 들였다.

 

, 츠키시마! 늦었잖아!”

 

저 까칠한 안경은 도대체 왜 불러낸 거야?”

 

까칠한 안경이라니! 성격 나쁜 제왕님 보다는 500배 낫다고!”

 

야마구치. 그만 해.”

 

, , 미안 츠키!”

 

츠키시마는 얌전히 앉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바쁘게 오갔다. 사람들 속에서 찾길 바라는 간절한 무언가. 아마도 그는 밝은 노란 머리카락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눈 속에 가득 찬 그 황홀한 빛을 기억하고자 연신 눈을 깜빡거렸다. 이야깃거리가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래간만에 마주친 그녀를, 본능적으로, 여러 번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야치, 결혼한다고 그랬지?”

 

그래서인지 그 말에 퍽 놀라버렸다. 갈 곳 잃은 동공이 맞은편의 여자아이에게 머물렀고, 무심한 그 눈길에 응당 걸 맞는 눈빛이 되돌아왔다. 그녀가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서, 츠키시마는 웃었다. 그녀가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야마구치 쯤 되어주지 않으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옅은 웃음이었다만, 그는 필요 이상으로 웃어보였다. 마음이 아픈 정도가 아니다. 얻어맞은 곳을 자꾸만 때려 덤덤해진 통증은 덧없이 두근거렸다. 과거 자신이 끔찍이도 싫어하던 그 거북한 감정이다. 울렁거리는 속을 들키지 않으려고 츠키시마는 애써 태연한 척 숨을 골랐다.

덧없이.’

머릿속이 온통 그녀와 관련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 지는 들리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웃어 보인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해 줬으면 좋겠어.’

 

다 알고 있었으면서, 너무했어, 그치.’

 

츠키시마군은 무지 친절한 거 같아. 분명 좋은 남자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그 사람에 관해서라면 아마도. 행복할 테니까, 이제.’

 

그제야 명확해졌다. 그날의 모진 말들은 모두 자신을 향한 말이었다. 그녀가 자꾸만 신경 쓰인 이유, 그 울음을 지나칠 수 없었던 이유, 자꾸만 지켜보고 곁에 있고 싶었던 이유, 지금 느껴지는 이 저릿한 통증의 이유.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럼에도, 모든 사실을 알아버렸음에도, 그녀가 행복하다면 아무래도 괜찮다니. 예상을 한참이나 빗나간 결론이다. 상상한 것 이상의 감정이었다. 츠키시마가 그것을 깨달은 것은 이미 한참이나 봄이 지나버린 계절. 그저 한 때 저보다 소중한 사람이 있었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마도 네가 나의

 

그런대로 잘 됐네, 야치. 축하해.”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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