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쿠로스가] 인어공주야.

연성질/안녕큐 2016. 2. 8. 03:11

 나는 언제나 너의 한 발 뒤에 있었다. 흔들리는 은발의 뒷통수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좋았다. 자신의 토스가 끝끝내 득점으로 연결되었을 때에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시들게 하는, 오로지 자신만이 반짝거리는 미소를 보였다. 너희 까마귀는 이해할 수 있잖아? 나는 그 반짝임이 갖고싶었다. 너를 온전히 독점하고 싶었다. 그러나 네 곁에는 언제나가 있었다. 잠시도 네 곁에서 떨어지지 않아, 너를 감상하는 것을 지독하게 방해하였다. 단 한순간. 네가 벤치에, 그가 코트에 있는 순간을 제외하고.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 사이에 있어서 사라져야할 존재였다. 준비를 거듭하였다. 나는, 이를 위해서, 언제나 너희의 너의 한 발 뒤에 있었다.

 “다이치!”

 “뭣들 해, 빨리 구급차 불러!”

 왜 그런 표정이야, 스가와라. 우리의 방해물이 없어진 이 시점에 가장 행복해야 할 사람은 바로 너와 나인 걸. 나는 어느 누구도 죽이지 않아. 내 소유물이 아닌 이상 그런 취미 없어. 그저 날개를 꺾었을 뿐이야. 날 수 없는 새는 더 이상 쓸모가 없잖아? 그러니 나를 봐. 내게 고개를 돌려라. 어미 잃은 아기새를 어떻게 대해야하는 지에 관한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넋이 나가 벤치에 앉아있는 너에게 다가가 무겁게 한마디를 내뱉으면 될 일이었다.

 “미안해, 내 잘못이야.”

 “... 괜찮아. 경기 도중에 일어난 일이고, 다이치라면 분명히 다친 쪽이 네가 아니라 다행이다- 라고 했을테니까.”

 웃으며 내 등을 토닥이는 너의 목소리에 어딘가 슬픔이 어렸다. 한층 더 아름다워졌을까나. 그 이후로 나는 너와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운명이랄까, 그의 병원에 가면 언제나 너를 마주쳤으니까. 너는 언제나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 말은 마치 자신에게 내뱉는 말 인 것 같았다. 언젠가 말 없이 안아주었을 때에는 내게 기대어 울음을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어느 쪽으로 보나 결과는 오케이였다. 이번에는, 두 다리를 잘라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쿠로오?”

 “아, 왔어, 스가?”

 그 이후로는 예정된 일 그대로였다. 나의 노력 끝에 너는 그 마음을 알아주었고, 천천히, 조금씩 나는 너의 삶에 녹아들었다. 한 때 의 것이었던 반짝이는 구슬이 바로 눈 앞에 놓어졌다.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절대 서두르지 않아. 두 번의 실패는 없어. 기다리고 기다리니 금세 해가 떨어졌다. 고요한 어둠이 깔린 도시야말로 고양이의 집. 한 번 봐둔 사냥감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인어공주 스가와라. 내게도 토스를 올려, 그 환한 미소를 보여줘. 나의 배구는 너와 함께이고 싶어. 응, 나와 함께해줄래?

 너는 수줍게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아아- 드디어 눈부신 별빛 하나가 내 손에 들어왔구나. 왕자 따위는 관계 없어, 애당초 인어에게 다리를 갖고 싶어- 라는 빌미를 제공하지 않으면 되는 거야. 그렇담 애써서 도망칠 다리를 잘라내거나, 미움을 사 괴로워할 필요가 없어. 나는, 나를 사랑해주는 네가 좋아. 그런 너를 갖고 싶었던 거야. 네가, 너의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내게,

 “쿠로오...?”

 흐릿한 너의 눈이 제 색을 찾더니, 짙은 눈물방울을 툭툭 떨어뜨린다. 붉은 빛에 엉켜진 회색 머리칼이 아름답다. 스가와라, 내가 갖고 싶은 것은 반짝이는 너의 구슬픈 목소리야. 빛을 잃기 직전의 감미로운 비명. 너라면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그렇지? 자, 인어공주야. 이제 네 목소리를 들려주렴.

_

 코즈메 켄마. 스가와라 코우시.

 “아카아시!”

 “아, 오셨습니까. 보쿠토상도 금방 도착할 겁니다.”

 안녕, 인어공주야.

 

+)

 안녕, 켄마. 보고 있어? 친구가 생겨서 더는 외롭지 않겠네. 팔도, 다리도 없지만 너는 여전히 아름다워. 내가 가진 모두를 통틀어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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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큐/츠키야마] 나와 같아. 下

연성질/안녕큐 2016. 2. 7. 16:24
 늘상 곁을 지켜주는 녀석이 있다. 첫 만남은 꽤나 오래 전, 뭐, 옛날 이야기는 취미가 아니니 그 정도로만 해두고 덧붙이자면 여전히 이런 사이이다. 언제나 내 옆에 붙어서 나의 기분을 알아주고 이것저것 이야기 해주고, 가끔은 귀찮게 굴지만 최근에는 그런 모습도 봐줄만 한 것 같다. 나랑은 정반대의 느낌. 늘상 생글거리고 열심이다. 바보 콤비 앞을 제외하면 항상 친절하고 상냥한 편이다. 지나가다 붙들려 나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어 귀찮을텐데도, 내가 시끄럽다고 핀잔을 주어도 웃는 얼굴이다. 그 웃는 얼굴이 보기 좋다.

 “안경군은 항상 함께 다니는 딸기군을 좋아하지?”

“하아? 딸기군은 또 뭡니까. 그보다 그 안경군이라고 부르는 것 좀 그만두시죠.”

“그렇담, 츳-키?”

“카라스노의 1학년 그만 괴롭히고 이리로 와, 쿠로.”

“아, 알겠어, 켄마. 혹시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연락하라고. 츠읏-키.”

 너만이 부르던 그 이름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자니 이상해. 차라리 안경군이라던가, 호타루라던가 하는 호칭이 나을지도. 끔찍하게 싫던 별칭이 더 낫다니. 그렇지만 야마구치가 나를 부르는 ‘애칭’같은 것이 다른 사람과 공유된다면 그거대로 마음에 들지 않아. 그의 마지막 말이 무슨 의미일까 생각해보았는데, 어째서인지 휴대폰에 번호가 저장되어 있더라. 그러고보니 그가 늘 붙어다니는 작은 세터와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고.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아니, 역시 그건 좀 별로일지도.

 쿠로오상을 만났어. 도움이랄까, 이 사람은 그냥 날 놀리는 일이 즐거운 것 같지만 이걸로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이건 친구에게 갖는 감정이 아니야. 근데, 난 있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두려워. 이런 점은 형과 조금도 다르지 않네. 어쩔 수 없잖아? 같은 츠키시마인 걸. 모른 척 할 거야. 전부터 날 향한 네 눈빛은 항상 동경. 네게 난 그저 그런 존재였지. 난 다가가는 법을 모르는데 넌 나를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해. 애당초에 내가 다가가려 해도 네가 도망가 버릴지도 모르는 노릇이잖아. 스스로 괴로운 일은 만들지 않을 거야. 형처럼 되지 않을 거라고.

“저, 츳키-”

“약속이 있어. 먼저 갈게.”

“으응, 알겠어..”

 그 이후로도 몇번이고 쿠로오상을 만나 조언을 구했다. 그는 곧잘 나를 아이취급하며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그럴때마다 그의 입에서 언급되는 야마구치의 이름에 별다른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부끄러움. 낯선 감정이었다. 빨리 달린 것도,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아닌데 심장 박동수가 높아졌다. 그 이상한 감정이 어색하였다. 그리고는 다음 날, 야마구치, 너를 봤을 때 처음으로 감정에 이성이 잠식당함을 느꼈다. 본능이 소리쳤다. 들켜서는 안돼, 절대로.

“츠키시마, 집 가자!”

“아, 오늘은 안돼.”

 1초만 더 머물렀다면 위험했을 거야. 당장에 떠오른 느낌에 휘둘려 내 멋대로 행동했을 거야. 이런 거 있어서는 안되는 거잖아. 넌 항상 노력하는데, 난 전혀 그렇지 않아. 네 충고를 듣고도 전혀 변하지 않았어. 멋있는 건 이쪽이 아닌 네 쪽. 도망치고있는 건 항상 나였어. 그렇다고, 이걸 알아버렸다고 해서, 뭔가 해결되는 건 아니거든. 난 항상 이럴 거야. 평생 변하지 않겠지. 언젠가 너도 이런 날 알겠지. 그렇다면 나를 떠날 거야? 그렇게 된다 해도 나는 잡지 못할, 않을 거야.

 “근데, 케이(츠키시마의 고집으로 바뀐 호칭), 진심으로 거절인 거냐? 딸기군이 널 좋아하더라도?”

 “그런 터무니 없는 가정은 관두죠. 그리고 야마구치를 그런식으로...”

 야마구치가 날 좋아한다면? ‘츳키-’하는 음성이 떠올랐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주근깨 투성이의 귀엽지 않은 얼굴로 웃음짓는 모습이 머릿 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쿠로오상의 손이 머리 위로 올려졌다만 지금은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뭐라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이 자꾸만 드러나 혼란스러워지면 자꾸만 감정에 지배되었다. 지금처럼 눈 앞의 야마구치 두고도 반갑지 않은 척 거리를 좁힌다거나 하는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아, 잠시만.

“야마구치...?”

 야마구치의 표정이, 뒷모습이 이상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빠르게 눈 앞에서 사라졌다. 공간이 닫혔다. 모두가 잠잠해졌고, 야마구치가 서 있던 곳, 달려나간 곳에 차례로 그의 모습이 형상화 되었다. 느릿하게 눈이 마주치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것봐라, 주전 선수 명단에 츠키시마라는 이름은 없지 않으냐. 오래 전의 기억에 야마구치가 끼어들었다. 소꿉친구를 연애대상으로 느낄리 없지 않으냐.

“츠, 케이. 이대로 놓지면 영영 잡지 못한다고?”

“괜찮아요. 어차피, 언젠가 겪을 결말이었고, ...”

 괜찮지 않아. 마지막 그 얼굴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아서 너무 걱정 돼. 이대로 널 영영 잃을까봐 두려워. 내가 지금 뭘 해야해? 너무 늦어버린게 분명한데. 이제와서 나는 사실 너를 좋아했으니까 우리 친구는 그만두자고 이야기 해야 하는 거야? 그런 거 말도 안 되잖아. 바보같아. 전처럼 다가와서 물어 주었으면, 마법처럼 모두 이야기 해버렸을지도 모르는데. 네가 너무 다른 사람인 것 같아서, 내가 알던 야마구치가 아닌 것 같아서 도망쳤어. 네가 없는 곳으로, 너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한심하네.”

 쿠로오상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 그의 판단이 정확했다. 수 없이 많은 기회를 걷어차, 이 자리까지 나를 밀어낸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한심한 놈. 그 말이야말로 지금의 내게 가장 어울렸다. 숨기기에 급했고, 지켜낼 의지가 없었다. 봐줄만 한 적당선만 넘기면 그거대로 오케이였다. 간혹 성에 차지 않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한심한 녀석이 맞다. 그러나 역시 남에게 들으면 열받네.

간신히 마음을 먹었는데 넌 학교에 왜 안 나왔을까.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전화할 용기가 났는데 기나긴 신호 연결음을 끝으로 넌 끝끝내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잖아. 정말 많이 아픈 걸까, 그게 아니라면 단지 내가 보기 싫어진 걸까. 어느 쪽이든 싫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잠 들어서 받질 못했어, 미안해 츳키]_야마구치

 [할 얘기 있는데 너희 집으로 가도 돼?]_야마구치

 연락이 온 것은 저녁이 되어서였다. 두 번째가 아니라 다행이야. 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이른 감이 있었지만, 야마구치의 문자 두 줄이 충분히 안도감을 주었다. 신이 이토록 한심한 나를 가엾게 여겨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일까. 도저히 그 이상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다. 뭐라도 해 보는 편이 낫잖아. 그걸 위해 그동안 쿠로오상을 만났던 것이고, 결국 결정을 내리는 것은 나야.

 ‘켄마는 내가 배구를 하는 이유야. 네게도 그런 거잖아, 딸기군이.’

 ‘그래.’ 짧은 답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어. 괜히 늘 집에서 입던 면티를 새것으로 갈아입고 혹시라도 네가 들어올까 방 청소도 다시 했어. 형 도움으로 감기에 좋다는 유자차도 끓여놨어. 너만 오면 돼. 이런 거 전혀 나답지 않은데, 사람이란게 강한 동기가 있으면 변하기도 한다잖아. 떨리고 긴장이 되는데, 네가 기다려지는데, 무서워. 무섭다. 모두 알아버린 네 반응이 어떨까 두려워. 널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봐.

 초인종이 울렸다. 급하게 문을 열었다. 추워서인지, 감기탓인지 붉은 얼굴 탓에 ‘딸기군’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목 뒤가 화끈거렸다. 심장이 펌프질을 시작했고, 그에 맞춰 호흡이 빨라졌다. 더 있으면 귀라던가, 얼굴이라던가 야마구치처럼 빨갛게 변할 것 같았다. 음이 엇나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말을 뱉었다.

 “빨리 안 들어오고 뭐해?

 “저, 츳키-”

 “감기잖아, 볼이 빨개.”

 얼굴이 일그러져서, 그 날 같은 표정을 지어보여서 가슴이 철렁했어. 정말 이대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네가 울먹여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듯 위태로운 모습으로 서서 무언가를 간신히 참아대며 입을 열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물어도 돼? 그 눈물의 의미가 뭐야. 너는 뭐가 그렇게 무섭고 두려운 거야.

“좋은 사람 만나서 다행이다. ”

 ‘딸기군이 너를 좋아하더라도?’ 그 말이 왜 이 타이밍에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그저 그 한마디가 몇번이고 귓가에 맴돌았다. 야마구치의 눈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야마구치가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들썩이는 어깨를 보면서 무슨 행동을 해야할지 몰랐다. 예상이라던가, 상상과 전혀 다른 전개에 벙쪄있었다.

“네코마의 주장이라면, 정말 멋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 쯤 되어야 츳키랑 어울리니까.
난 정말로 잘 됐다고 생각해. 축하해 츳키―”

“야마구치.”

 나의 부름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억세게 깨문 입술에 상처가 생길 것 같았다. 이런 것은 정말 이상하다. 사고회로가 정지하고 내가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르는 상태. 한참을 몸을 움직여 그에게 다가가서야, 우리가 너무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무슨 생각으로 네게 입을 맞춘 건지는 모르겠어. 놀란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멈춰진 네 모습이 조금은 우스웠어.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알 수 있어. 이 두근거림은 나만의 것이 아니야. 잡아도 될까. 네 손을 잡아도 괜찮을까.

 “츠,츠츠츳키― 저기, 이건…!”

 “시끄러워, 야마구치. 들어왔다가 가.”

 야마구치의 손목을 잡았다. 귓바퀴가, 온 몸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건 아닐까 불규칙한 호흡에 걷는 것도 힘들었다. 손목 너머로 느껴지는 야마구치의 나만큼이나 불규칙하고 가쁜 것 같았다. 늘상 함께있었는데 처음 만났던 날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두근거렸다.

 “나 아픈 거 같아, 츳키!”

 “감기면서 밤중에 돌아다니고 그러는데 안 아픈 쪽이 이상한 거지.”

 나는 이런데, 이런 상황에서 하는 말이 ‘나 아픈 거 같아, 츳키’? 나, 참 그러니까 아프면 집에서 쉴 것이지 귀찮게. 알맞게 식은 차를 컵에 담아서 건넸다. 받아든 표정이 잔뜩 들떠, 나까지 붕 뜨는 거 같았다. 이런 거 정말 귀찮고 짜증나는데, 너라면 나쁘지 않아. 나도 너와 같아, 야마구치.

 

+)

 야마구치 타다시. 작은 체격에 주근깨 투성이, 전혀 귀엽지 않은 얼굴. 나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뭐, 다른 사람이라고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굳이 꼬집어 말해 첫 눈에 반한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그 쪽이 이상하지 않을까. 고작 초등학생이 누군가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지다니, 그것도 동급생의 남자아이를. 어쩌면 나는 애초부터 이상한 놈이었을지도.

 야마구치, 네 기억 속 그 날은 내가 노리고는 들어간 거라고. 너에게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 그냥 한 번쯤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보고 싶어서 대충 아무 말이나 내뱉은 거라고. 절대 멋있지 않았어, 너의 영웅도 아니야. 그래도 그 날, 망설이지 않고 너를 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야마구치.˝

˝응, 츳키―!˝

 아마 너보다 내 쪽이 훨씬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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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큐/츠키야마] 나와 같아. 上

연성질/안녕큐 2016. 2. 6. 03:58

 친구가 있다. 친구랄까, 항상 내가 곁에 붙어 말을 시키는 것이 고작이지만 적어도 나를 내버려둔다거나 무시하지는 않으니까 친구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키도 크고 인기가 많아, 항상 인상을 쓰고 있다.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것도 모르고 다들 츳키의 주변을 서성이며 소리를 지른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는 쉽게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만, 내게는 시끄럽다며 곧잘 주의를 준다. 우리는 어쩌면 꽤친한 사이일지도 모른다. 

 

“츠키시마, 집 가자!

 

아, 오늘은 안돼.

 

 요즘 들어 부쩍 어디론가 사라지는 거 알아? 이전에도 그런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까지 자주인 것도 처음이고 어디에 다녀온 건지도 도저히 말 안해주고. 서운? 서운한 것일까. 내게 비밀이 생겨서? 그러니까 이전에도 내게 뭐든 털어놓는 사람은 아니었잖아. 그래. 그러고보니 아는 것도 얼마 없어. 형에 관련된 일이라던가, 좋아하는 음식이 쇼트케이크라던가 하는 일 말고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잖아. 

 

“돌아가야지, 그만.”

 

 초등학교 일이 떠올랐어. 날 도와주려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날의 츠키시마는 오늘까지도 내게 영웅과 다름없지. 존경하는 사람. 멋있는 사람. 항상 곁에 있고 싶었어. 나는 항상 츠키시마의 옆에 있고 싶었다고. 귀찮아한 거 알아, 시끄럽게 굴어서 미안해. 츠키시마는 나와 다르다는 것 쯤은 나도 알고 있는데 말이야.

 

“이게 뭐야….

 

 소꿉친구. 일방적인 관계라 내게도 어울리는 단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소꿉친구를 좋아하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네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면 나는 이해해줘야 하는 거잖아. 그래야 네 곁에 있을 수 있겠지? 난 괜찮아. 난 정말로 괜찮다고. 나쁠리 없잖아. 츠키시마 네게 좋은 사람이 생긴 건데. 정말로, 정말로 괜찮지 않아. 괜찮지 않아. 츠키시마의 곁에 항상 있었던 것은 난데,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왜 그가 있는 거야? 츳키 대답해줘. 나는 네게 뭐였어?

 

 답 없는 물음이 떠돌기를 한참.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츳키의 뒤를 따랐어. 어쩔 수 없잖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 일이었어. 조금 후회스러워. 내가 츠키시만큼 이성적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이 장면을 보지 않아도 됐겠지? 네코마의 주장을 특별히 여긴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어. 그런데 나에게 비밀로 했던 일들이 고작 그를 만나기 위해서 였던 거야? 어째서? 내가 말하면 츳키가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막을까봐? 그럴리가 없지. 그냥 귀찮아서 일 거야. 나는 츠키시마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닌 걸. 츠키시마와 나는 단 한 순간도 같았던 적이 없었던 거야.

 

  멀리서 보였다. 다가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네코마의 주장이 츠키시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츳키는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운 듯 안경을 고쳐 올렸다. 평소의 표정과는 사뭇 달랐다. 여전히 미간이 잔뜩 좁혀진 화난 인상이지만 어딘가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나는 본 적 없는 모습이다. 내게는 없는 츠키시마다. 이 거리에서만 볼 수 있는 츳키다. 욕심이 났다. 한 걸음을 내딛었다. 금세 들켜버릴텐데, 나는 무엇을 위해서인지 자꾸만 앞을 향하려 했다. 조금만 더 가까이에서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나는 그를 포기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야마구치…?

 

 처음으로 네 입에서 나온 나의 이름이 달갑지 않았어.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어. 맞아, 난 겁쟁이라서 도망쳤어. 모두 알아버린 나에게 츠키시마가 무슨 태도를 보일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어. 나는 말야, 아직도 츠키시마에 대해서 잘 모르겠어. 그런데도 너를 잃고싶지 않아, 츳키. 조금만 기다려줘. 정말, 아주 조금이면 돼. 모두 금방 끝날 거야. 정말 금방.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나를 밀어내지 말아줘. 나는 네가 좋아.

 

 미안해, 츠키시마. 나는 겁쟁이인 주제에 욕심이 많아서 너를 포기할 수가 없어. 그치만 네가 없는 건 죽어도 싫어. 그것만큼은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지금 이대로도 충분해. 예쁜 여학생들에게 츠키시마의 우체통 정도로 취급 받지만, 내가 츳키와 친하다는 것 같아서 기분 좋아. 그러니까 츠키시마, 내가 널 포기할게. 친구로라도 옆에 있어줘.

 

 아침이 밝았다. 학교에 가야 하는데, 어쩐지 몸이 무거웠다. 몸이 불덩이 같았다. 오늘 꼭 츠키시마를 봐야 하는데,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 학교를 빠졌다. 츳키가 나의 걱정을 해주어으면 좋게다는 생각을 했다. 포기라니, 어쩌면 나는 평생 짝사랑만 하다가 죽을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온몸이 쑤시고 아픈 와중에도 바보같은 생각이 떠올라 웃었다. 그러다 눈을 감았고, 잠이 들었다. 일어난 것은 저녁이 다 된 시간, 그리고 츠키시마로 부터의 한 통의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잠 들어서 받질 못했어, 미안해 츳키]

[할 얘기 있는데 너희 집으로 가도 돼?]

 

 답은 없었지만 이미 츠키시마의 집을 향하고 있었다. 아직 조금 어지럽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츠키시마와 어색하게 되어버릴지도 몰라 불안해서 도저히 가만히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항상 걷던 길이 오늘따라 낯설었다. 더디고 멀게 느껴졌다. 다짐이 꺾이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나는 어느새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지금은 조금 곤란하다는 츳키의 답장이 오기를.

 

[그래.]_츳키

 

 신은 어째서 항상 나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걸까. 나 너무 무서워, 츠키시마. 널 보러 가는 길이 이렇게나 무겁고 슬프게 될 줄 몰랐어. 그런데 돌아갈 수 있을리가 없잖아. 오늘이 아니면 말하지 못할텐데, 그렇다면 츠키시마도, 나도 계속 그 일을 신경 쓸테니까. 그래도 츳키는 걱정하지 마. 나는 항상 네 편인 걸-

 

 츠키시마의 집 앞에 도착했다. 초인종을 누르기 이전 망설이던 손가락이 꿈틀거리는데 문이 열렸다. 얇은 면티 차림의 츳키가 나를 바라봤다. 무심한 표정 뒤로 그 날의 얼굴이 겹쳐졌다. 나에게도 보여준다면 좋을텐데.

 

“빨리 안 들어오고 뭐해?

 

“저, 츳키-

 

“감기잖아. 볼이 빨개.

 

 이전과 같은 다정한 한 마디에 울어버릴 뻔 했다. 정확히는 이미 가득 차오른 눈물을 애써 참아보려고 했다. 귀찮아 할 거야, 츠키시마가 나를 싫어하게 될 거야. 꾸역꾸역 넘어오는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좋은 사람 만나서 다행이다.

 

 어젯밤 잠들기 이전에 여러번 연습했지만, 역시나 실전에서는 어려웠다. 위기의 순간 핀치서버로 투입되었던 그 날만큼이나 떨리고 무서웠다. 게다가 오늘은 감정이라는 복병까지도 나를 방해했다. ―결국 눈물은 두어방울 흘러버렸다만, 묶어놓았던 것들이 터지는 것을 겨우 막았다.

 

“네코마의 주장이라면, 정말 멋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 쯤 되어야 츳키랑 어울리니까.

난 정말로 잘 됐다고 생각해. 축하해 츳키―

 

“야마구치.

 들려온 음성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물기가 가득차 시야가 불편했지만, 더는 츳키를 성가시게 하고싶지 않아서 눈을 부릅 뜨며 참았다. 그리고 가볍게 츠키시마의 입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어라…? 츳키의 입이?

 

 고개를 든 이후의 기억은 흐릿해. 아마도 나의 상상이 더해진 꿈이 아닐까 싶어. 가끔, 현실과 도저히 구분하기 어려운 생생한 꿈을 꾸기도 하니까. 적어도 츠키시마가 내게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은 꿈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잖아. 그렇지? 그런거지, 츳키? 이건 꿈일 거야. 꿈….

 

“츠,츠츠츳키― 저기, 이건…!

 

“시끄러워, 야마구치. 들어왔다가 가.

 

 깨어날까봐 불안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눈을 뜨면 눈 앞에 익숙한 천장이 보일까봐 걱정되었다. 그러나 츠키시마가 잡아챈 나의 손목이, 그곳으로 느껴지는 따뜻한 열기가 이곳에 현실임을 이야기해 주었다. 붉어진 귓바퀴. 반대쪽을 향한 눈동자. 수줍어 보이는 그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조금 보태자면, 그 날의 츠키시마와 굉장히 비슷했다.

 

“나 아픈 거 같아, 츳키!

 

“감기면서 밤 중에 돌아다니고 그러는데 안 아픈 쪽이 이상한 거지.

 

 잔뜩 인상 쓴 표정으로 건네준 컵을 받아들었다. 그 안에 가득 담긴 유자향이 달콤했다. 그의 기분도 이럴까. 그렇다면 완전히 나와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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